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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Sep 01. 2022

나의 나비는 너를 닮았을 거야

정처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너도 이미 알잖아?

한 우물 파는 데에 도가 텄다. 어쩌다가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꽂혀 이런저런 사랑들을 박박 긁어먹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택배를 받으러 가는 어딘가로 달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이하 '사누최')였다.


어마무시하게 아주아주 미미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8할, 아니 9할이 내 이야기...






옛날엔 문득문득, 요즘엔 정말 자주 자유로움에 대한 생각을 했다. 20대 초반인 나에게 있어 아주 흔한 시기에 불어온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어딘가에서 풀어주고 싶다는 욕망이 의미하는 것은 즉, 내가 어딘가에 묶여있는 것 같다고 느낌이리라. 

나를 묶어둔 것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맞다. 나는 나에게 묶여 그 어떤 것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나를 찾는 중인데, 그 행위가 참 음침하다. 파티에서 율리에를 만났다면 나도 펄펄 뛰다가 머리를 밀어버렸을지도. 




나는 전체적으로 율리에의 정처 없는 기질을 닮았다. 다들 나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내 끈기를 닮고 싶다고들 말한다. 나의 끈기는 장점이라고 말한다. 난 겁이 많고, 그래서 잘 도망가고, 끝을 볼 줄도 모른다. 내가 '정'이라는 글자와는 참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만 아는 것 같다. 나는 늘 안정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으니까. 글을 쓰면서 한자어를 찾아보니 참 웃기다. 나의 무의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 이유는 내가 '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끈기가 나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나는 장점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끈기라는 놈 멱을 잡아 질질 끌며 살아내고 있다. 그렇게 찍은 마침표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겠지만. 나는 그래서 율리에의 괴짜같은 정처없음에 크게 웃었다. 이야, 너 참 기괴하구나. 너 참 기괴하다.




율리에는 글을 쓰는 인간이었지만, 누군가로부터 언어를 죄 빼앗긴 인간들의 삶을 애정했을 것이다. 정의義를 싫어했음이 분명해! 모순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걷잡을 수 없음을 사랑했을 거야.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렇기 때문에 악셀과의 대화를 애증했을 것이다. 악셀의 관점에서 율리에는 '약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약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나와 대화를 나눠줘! 그러나 나에게 공감하려고 하지는 마! 내가 느끼는 것을 이해해줘! 그런데 더 이상 묻지는 마!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율리에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다. 나도 하늘을 참 좋아하는데. 춤을 망가지게 추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는 못하지. 못 추니까. 율리에는 잘 추나? 그건 아닐지도. 또, 난 아버지랑 사이가 참 좋다. 그것도 다르지. 한 번씩 아무도 모르게 변태같은 생각을 하고 얼른 지워버리는 것은 나의 것. 그걸 마구 뱉어버리는 것은 율리에의 것이다. 

 율리에가 걸을 때마다 나는 쾌변을 한 느낌이다. 율리에의 방귀소리는 부끄럽지 않고, 경쾌하다. 계속해서 '나'를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율리에의 앞에다가 이 사람 저 사람 앉혀다 놓고 싶었다. 

'나도 정의하고 싶지 않은데, 말하고 싶어. 내가 바뀌는 거 같을 때마다 내 주변 모든 부품을 싹 다 갈아 끼우고 싶어. 레고처럼, 나를 쏙 뽑아서 내가 원할 때마다 원하는 환경에 집어넣고 싶어.'

율리에는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거 같았다. 율리에는 악셀이 괴짜같은 자신을 욕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삶에 없다고 했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와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율리에는 그렇게 자신의 이상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존재에게로 가 언어를 나눴다. 내가 예의바른 사람이 되고자 할 때, 나는 예의바른 사람이 좋았고, 예의바른 사람 곁에 있었다. 내가 자기주장을 똑바로 펼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그러한 사람이 좋았고, 그러한 사람 곁에 있었다. 애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자기를 구성하는 세계를 뒤엎는다. 자신이 구상한 이데아에 맞춰서. 미친 듯이 이기적으로 구는 게 괘씸한데, 율리에는 사랑스럽다. 변화하는 자신을 읽고, 그것에 솔직히 굴복한다. 

그래, 나 갈대다. 보태준 거 있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의 본질에 집중했기에 인간적이며, 동시에 본능에 충실함만이 인간이 쥐어짠 용기였기에 영화적이었다. 




시집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 김이듬, 날마다 설날 

인간은 그렇게 늘 사랑하며 산다. 대상이 어떠하든. 결국 우리의 성숙과 미숙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 수는 없는 법. <사누최>는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사람의 12가지 챕터를 보여주고 있다. 웃긴 건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최악이 되어가며 지독하게 사랑이 이끄는 대로 방황했던 율리에는 그 끝에 성숙을 맛보았을까? 아마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자유롭게 날아다녔을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불안이 필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에는 자유로우면서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율리에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불신이었으리라. 자신을 섣불리 정의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려고 했다. 율리에는 자신이 지독하게 날아다닐 운명인 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율리에도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그것조차 율리에는 확신하지 않는다. 그러한 불신이야말로 되려 율리에를 불안에서 멀어지도록 만든 진원지가 분명하다. 율리에는 자신의 13번째, 14번째, 15번째... 연속된 챕터들이 나열되는 동안에 꾸준히 날아다녔을 것이다. 율리에의 인생에서 성장과 성숙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끝까지 결점 투성이인 자신을 떠안고 살 준비를 일찌감치 마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성차별주의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감성적이지만,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집이 세지만 매사에 호불호가 강한 편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예민하다는 말보다는 유순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예민한 게 맞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나는 율리에를 사랑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내 가슴속에 존재하는 나비일 거다. 나의 무의식에서 억세게 버티는 자유의지가 안정을 향한 욕구의 형태를 하고 의식의 수면 위로 보여왔다. 그러다 율리에를 본 나의 심연은 자석처럼 그녀에게로 날아가 붙어버릴 거 같았다. 

율리에가 남자들을 사랑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율리에를 사랑했다.

나의 나비와 닮아서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하는 내 심연의 이상향과 닮아서. 

'모순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아.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 인간아.

그대야말로 진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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