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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May 07. 2023

이니셰린의 밴시 - 실마리

킬러들의 도시(국내에 개봉한 제목으로 쓰겠다), 세븐 싸이코패스, 쓰리 빌보드


   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듯 연달은 각각이 깊숙한 홈을 새긴 영화들의 이름. 별 유명세 없는 영화들만 고집스레 상영하는 집 근처의 영화관에서 한 훗날 이 시대의 거장으로 돋을새길 마틴 맥도나의 신작을 마주하며, 작문에의 욕망, 그렇게 해서라도 곧 휘발할 순간의 감상들을 붙잡아 두고 싶다는 절박함을 그토록 강렬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구태여 개인의 역사를 말하자면 권태였다. 시간이 날 때면, 따라서 매 주말마다 그것이 의무인양 찾아보는 영화들은 내 감각의 종단부터 머리끝까지를 무디게 만들어서 나는,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막연히 신뢰했던 A감독의 영화들을 보면서도 내내 딴생각만 하는 제 모습에 적잖이 놀람과 동시에 또한 상실감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그러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일부러라도,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영화관에 가는 것을 습관처럼 행했다는 사실은, 달리 말해 그러지 않고서는 - 즉 그런 형식성의 제약이 없이는 - 내 오랜 취미에 더 이상 정성 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정말로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혹은 몇년이 채 되지 않은 현대성에 발맞추어 어디서건 스크린 위로 영화를 재생한다는 일은, 그것은 다른 모든 예술을 마주함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모험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 전시회를 찾아 문밖을 나선다거나 책의 표지를 열어젖히는 그런 활기찬 몸짓은 말 그대로 긴 여정의 첫걸음을 떼는 일이다. 다시금 영화로 돌아와서, 넷플릭스로 대변될 스트리밍 문화에 맞서 고전적인 관람 양식의 잔존을 역설하려는 이들이 진정으로 강조해야 할 바란 이와 같은 모험의 성격이 아닌가? ‘모험하기’에 관한 우리들의 막연한 심상에는 적어도 아직까진 머나먼 한 곳으로의 (그러므로 공간상의) 이동이 필연적으로 결부되니까. 여하간에 문제는 그러한 모험의 요소들이 나의 활동적 삶에서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매일같이 하는 일에 낯섦이 깃들 리 없듯, 출근길이나 학생들의 등굣길을 여정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통상적인 사건들에 새로움은 있을 수 없다 - 이것이야말로 매너리즘의 가장 간명한 정의이므로. 그런데도 바보같이 주말마다 얼마간의 금액을 지불하는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코서 한 것인가. 그지없이 진부한 일과 속에 혹여나 도래할 참신함을 망상하는 나의 처지는 분명 성실한 사회가 권장하지 않을 것인 반-모범의 사례, 복권이나 도박 중독자의 논리와 동일한 바탕에 근거하고 있었다.


오늘 벼락을 맞을 때까지.

   

   여타의 진부한 영화들, 지난 한두 세월의 허탕, 갈망으로 부풀어 무겁고 푸석해진 마음을 좀처럼 떨게 하지 못한 평이함이 그간의 전부였는데, 이 <이니셰린의 밴시>가 어떻게 나를 감동하게 했느냐를 서술하는 것은 의당한 대가, 그것이 나로 하여금 짊어지게 한 의무일 것이다. 시작하자. 어떻게 그리 되었는가. 그것이 나의 전적인 주목을 끄는 데는 다만 몇 분 - 그러니까 이니셰린 전경의 위화로움을 조감도로 보여준 최초의 분절 이후 몇 분 동안 지속되었던 서넛 가지 장면이면 충분했다. "이 훌륭한 영화에 있어 당신을 가장 매료한 부분(이토록 모호한 표현이란!)은 무엇인가요?" 하는 질문에, 혹자는 중반부 펍에서의 인상적인 대담을; 누군가는 손가락을 절단한다는 스펙터클; 또는 정교하게 설계된 대칭성 곧 반복의 구조나; 과연 실력 있는 극작가다운 유머감각; 그도 아니라면 영화 전반에 걸쳐 산재하는 예측 불허함의 서스펜스를 꼽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로 흥분되는/몰입되는 부분(그것이 비단 전체가 아닐 뿐이므로 나로서는 이 같이 불명확한 표현을 쓸 수밖엔 없다)이란 영화의 초반부에 잦은 빈도와 밀도로 반복되는 하나의 구도 - 마치 어릴 적 펼쳐 본 그림책에서 낯선 세계로 여정을 떠나려는 그 안의 주인공을 보는 듯한, 후방에서 원경으로 향하는 인물의 약간은 멀리에서 뒤를 쫓는 이미지였다. 명백히 그에게는 더없이 친숙할 배경을 바탕으로, 그에게는 모두가 예외 없이 낯이 익을 인물들과 관계함으로써 오롯이 전개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감각의 심상은 전 사건의 중심인 파우릭에게나 앞으로 주어질 수십여분 이미지의 여정을 함께할 관객들에게나 매한가지로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온다. 그것은 음울하니 아득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경 음악이나 시퍼렇게 황량한 이니셰린의 풍경, 어딘가 부조화한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그리고 콜린 패럴의 멋모르는 연기. 과거 <킬러들의 도시>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심지어 전혀 다른 계보의 영화들에서도 그는 비슷한 배역을 줄곧 맡아왔다. 훌륭한 감독은, 또 재능 있는 배우는 그의 진가가 무언가 ‘잘 모르는' 인물을 연기하는 데 있음을 안다) 등의 복합적인 결과이나, 그 감상의 근저에는 이미 조금 멀찍이서 어딘가로 멀어져 가는 주인공의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가 중반부에 접어들며 그 최초의 모험적인 성격이 옅어짐에 따라 - 배경이 된 장소들은 물론이고, 처음에야 낯설었던 인물들이 점차 익숙함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대표적으로 툴툴대는 콜름, 그의 앞에선 그래도 나름의 성실함으로 말대꾸를 해주지만 결국엔 대문에다 피투성이 손가락을 내던지는 콜름소니래리 -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동일한 구도가 영화의 종반부에 재차 등장한 것은, 물론 영상의 첫머리와 균형을 맞추려는 감독의 다소간 강박적인 의중을 고려해야겠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영화의 줄거리(혹은 영화 자체)가 다시금 선명한 모험의 양상을 회복하였음을 선언하는 일종의 부호이다. 이번에는 콜름 측도 동일한 구도를 부여받았다는 점에 주목하자(이는 파우릭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이나 그녀는 기껏해야 작중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인물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같은 영예를 오직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날 밤 펍에서 파우릭의 방화 예고가 있은 뒤 묵묵히 교회로 향하는 그의 모습, 교회 건물 안에서의 노골적인 대칭성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두 인물의 입장이 바뀌면서 그들을 포착하는 영상의 형식 또한 그에 상응하여 달라졌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지껏 잘난 체하던 콜름도 예측할 수 없음으로, 이번엔 한껏 수동적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미지로의 여정을 체감하는 걸까? 그럼에도 종국에, 제 이미지의 세기와 지속과 반복에 비례하듯, 영화 속 진정한 모험의 주인공은 단 한 사람, 파우릭일 수밖엔 없었다. 콜름의 집을 불태우러 마차를 몰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이 영화의 백미로 꼽겠다.


    근래, 나의 내밀한 취미 활동, 현대적인 인식 체계에 예술의 위치를 정립함에 있어 일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깊이의 문제였다. 깊이의 문제무엇인가. 그것은 바슐라르가 주장하듯 현상으로 발해야  예술이  자체론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져서, 그래서 자기의 진지한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미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기를 신세 져야 한다는 , 다시 말해 예술이란 이름에는 한낱  이상의 무게가 실리지 못하고 그리하여 합당한 범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예술은 다른 공인된 체계들 - 보편적인 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진리성, 인간이나 사회 존재에 대한 일반론, 의식 또는 무의식의 도식들... 하여간 무엇이든지 - 로부터 근거를/ 뿌리를/ 깊이를 빌려와야 한다는 . 그곳에서 희생되는  저의 독자성이다. 너무나도 빈번히 예술은 대화의 진정한 주제가 아니었고 한갓 사례, 발언자의 논평을 뒷받침하고자 저열하게 고안된 일종의 거짓 귀납 연구의 대상으로만 다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그런 나의 사정에 불현듯이 타올랐다. 만약 예술이  본질상 낯설음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말마따나 인식의 모험이라면, 아름다움이 어디 바깥에서 빌려와야  근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의 안에서  완전함으로 길어낼  있는 것임을, 그러니까 완전히 내재적인 예술 이론이 마침내 기성의 검증된 체계 없이도 스스로써 변증될  있다는 확신을, 따라서 판단의 모든 개별성과 주관성에 억눌려   마디 하지 못할 사정은 마침내 아니라는 안도감을 그토록 구해왔던 수만 마디 말보다도 큼지막이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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