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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May 10. 2023

토니 타키타니

    원래가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의 나로서는 본인이 마주치는 (아마도) 모든 영화들마다 나름의 감상을 써 붙일 수 있다는 것이 - 제아무리 짧다고는 할지언정 - 어렵게만 사실상은 불가능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비단 전업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여럿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러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양가의 감정을 가진 적이,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한가한 취미라고 생각하면서도 속내는 그 열정을 부러워하였음이 한두 번이 아님을 감추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결론: 나는 그들 같은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내가 영화든 무언가를 보고 나서 글을 써야 하겠다고 느낄 때는 오직 둘 중 하나, 그 대상이 너무나도 찬란하게 아름다웠거나 혹은 끔찍하리만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그뿐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후자에 속했다.


   당초 어떤 경로를 통해 이 영화를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우연한 계기로써 난 언젠가 볼 것이라는 영화들의 긴 목록에 이 하나를 끼워 넣었고, 어느 날 밤 그 가운데 가장 길이가 짧았던(엔딩 크레딧을 합쳐도 1시간 16분에 불과하다) 한 영화를 선택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바이지만 그것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 영화를 볼 때에는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나마도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지만.


   제 상상력의 부족을 핑계 대며 이미 있는 소설을 빌려오는 영화가 해선 안 될 잘못들을 몸보이는 훌륭한 범례라는 것이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유일한 긍정적인 가치였다. 물론 소위 '원전'의 존재가 한 예술 대상을 자동적으로 폄하할 까닭은 되지 않는다. 외려 독자의 편에서도 독립된 작품을 감상할 때라면 그것의 원본 격일 무언가 - 이 경우와 같이 선행하는 다른 예술이 되었건, 자연물이나 역사 속의 일화가 되었건 - 를 한사코 잊어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이러한 사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라면 누구든 음악을 떠올리지 않을까, 수많은 재즈 스탠다드의 존재가 그 모든 연주를 구닥다리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므로. 하지만 마땅히 노력은 상호적이어야 할 것인데, 예컨대 제 서두에서, 보통은 제작사의 로고 영상이 지나고 본격적인 영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영화는 ~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라는 식의 맥 빠지는 문구를 삽입하는 경우에 독자는 대체 어떻게 일말의 기대라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토니 타키타니>가 예의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형편없었는지, 이를 정성 들여 기술하는 것이 오늘 내게 요구되는 몫일 테다.



영화라고 불린다는 것조차도 아쉬울 모독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맨 먼저 눈에 띄는, 즉각적으로 내 두 감각을 자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실상 이것이 앞으로 쓸 내용의 전부이니까. 히치콕(아마도, 확실치는 않다)은 언젠가 영화라는 장르에서 나레이션의 부적절함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필시 그토록 명망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저의 입장을 미신처럼 받들 이유가 없을뿐더러 지금에 와서는 당시 그가 주장을 펼쳤을 구체적인 논리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나 타인의 견해를 인용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지리한 논증의 전 과정이라기보다는 한 두 문장 결론일 것이다 - 즉 여기서 나의 목적은 한 인물의 사유를 순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전개할 내 사유의 아이디어를 취하는 것이므로. 여하튼 나레이션의 문제란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써 영화를 한낱 표현의/모방의 도구로 격하시킨다는 데에 있다. 이런 식의 견해가 영화를 소설이나 극의 전통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초창기 영화 장르의 옹호자들과 언뜻 비슷하리 생각될 수 있겠다. 그들의 입장은 요약컨대 - 무언가 내용을 전달하고자 제 고유한 양식과 기법의 활용에 몰두하지 않고 다만 편의를 추구하여 말로써 줄줄이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무궁한 확장성-표현력에 대한 불신일 뿐이라는 것. 이에도 일견 공감하는 바이지만 '표현'이라는 단어가 줄곧 마음에 걸린다. 그것은, 정말로 히치콕이 그러하듯이, 영화를 결코 예술로서 향유하지 못하는 일개 제작인의 시선이기에. 그와 대비되는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서 나는 나레이션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하겠다. "그것이 희곡이나(연극이 아니라) 특히 소설과 같은 여타 장르를 연상시킨다는 점, 더군다나 연상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의 모방이라는 인상을 갖게끔 한다는 점에서 나는 나레이션을 비판한다."


   상정된 가상의 히치콕과 같은 원리주의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선 이렇듯 양보적인 태도가 나레이션 자체를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음은, 그러니까 그것의 개별적 평가에 있어 각각의 특수성을 고려할 것임은 당연한 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있어서의 고유성, 맥락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원작인 소설의 존재, 그것도 지나치게 유명한 소설이 앞서서 존재함이겠다. 동명의 소설을 읽어본 경험은 없지만 영화 속 지겹도록 발화하는 얼굴 없는 대사들(꼭 마지막 한 두 마디는 직접 등장하는 인물들의 건조한 입술에게 사양되는)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했을지는 누구라도 어렵잖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갖은 문장 전부를 소설에서 따왔다고 하더라도 놀라진 않으리라. 처음, 영화의 주인공 또는 그의 아버지의 역사를 제시하는 십여 분 남짓의 영상을 시청하며 나는 적어도 그것이 서두에 국한될 것이라고 즉 영화의 시점이 (비교적인) 현재형으로 전환하며 이처럼 가당찮은 반영의 형식은 더 이상 멈추게 되리라고 수도 없이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정작 뒤를 이어 나온 것은 한 시간 가량의 고집 센 실망감뿐이었다.


   긴긴 시간이 지나고 같은 영화를 본 짤막한 감상들을 굳이 찾아보았을 때, 그것이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는 불문하고, 숱하게 반복되는 표현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만일 감독의 본래 의도가 원작인 소설에 대해 가능한 한 충직한 사본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평가에 그는 만족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의 편에서, 상영 시간 전체에 걸쳐 반복할 구조로서 차용된 영화의 형식이(형식이란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정말이지 모노톤의 극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단지 읽어본 적도 없는 소설만을 -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흉내 내려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을 자꾸만 갖게 했고, 그처럼 강렬한 사념은 이 영화가 가지는 이외의 어떠한 요소에도 눈길 주지 못하도록 두뇌를 잠식함으로써 내 전반적인 감상 자체를 망쳐버렸다.


   그리하여 이 영상이 나더러 보게끔 한 것은 장시간의 영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감독의 역량 부족 또는 철저한 자존감의 결여 - 그가 종사하는 직업, 그가 만들어 낸 사물, 나아가 영화라는 예술 장르 일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것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자격지심이었다. 애초에 독립하여 존재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예술일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모방의 대상이 또 다른 예술이라면. 처지는 더욱이 처량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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