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QP May 22. 2023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 미셸 뷔토르 (1)

큰따옴표는 직접 인용입니다.


   지난 겨울, 아마도. 그의 유일한 한국어 완역판 소설인 변경(소설의 원래 제목은 나의 추측과는 달리 la frontière가 아니라 la modification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 같은 경우에 한국어 번역이 원문에는 없는 오묘한 의미상의 풍부함을 더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문학적 성취이고,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그 내용을 생각해 봤을 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작업이었음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겠다. 특히 같은 소설의 영어판 제목이 second thoughts라는 그다지도 빈약한 일차원적 사고의 결과임을 아는 채로)을 읽었던 내가 그의 또 다른 저술에 이끌리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행히도 찾아본 바 국내에는 번역된 그의 책이 둘밖엔 없는데, 그중 하나는 물론 상기한 소설 <변경>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라 새롭게 이름 붙인 - 이 번역/창작에 대해서는 별달리 하고픈 말이 없다 - 소설에 대한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에 관한 에세이들(원어: Essais sur le roman)>이란 원어판 제목이 더 걸맞다고 느꼈다, 그의 소설과는 달리. 정말로 누보 로망임을 강력하게 피력하던 로브-그리예의 작품(누보 로망을 위하여)과는 대조적으로, 비단 20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그 견해의 평이함과 보수적임에 별안간 실망하였음을 고백해야겠다. 수개월 전 <변경>을 매 페이지 그토록 가득한 경탄으로 읽었던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책의 순서상 마지막 글인 <발자크와 현실>에서 잘 드러난 사유의 고전성 - 즉 반영(오직 모방이란 더욱이 극단적인 표현을 삼가기 위하여 차용된)이라는 문학의 정의이었다. 뷔토르의 입장에 발자크가 위대한 것은 그가 자신의 목표인 소설을 통한 "현실의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가능한 한 합목적적인 '형식'을 모색하였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행해 냈다는 데 있다. 대표적으로 225p에서 시작되는 단편의 네 번째 대목을 보자. 그곳에는 "허구적인 작중인물들이 실재 인물들의 집단을 재현"한다는 소설의 구체적인 기능이 제시되고, 곧이어 주어지는 문장에선 그 기능의 가능 근거가, 곧 재현하는 대상인 현실과의 유사성, 얼핏 자명한 명제가 서술되어 있다. "발자크의 상상적인 시인들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은 현실 자체에서도 시인들이 그들의 명성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재현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한다." 이후에도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발자크의 작업을, 주로 그 형식이란 측면에서 분석하고 실용적인 문학의 이념이란 준거로써 평가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의 확고함은 글 전체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곳곳에 산재하는 달리 해석하기가 불가능한 일방의 표현들이 이를 증명하며 마찬가지로 같은 책에 수록된 다른 모든 단편들에서도 뷔토르의 동일한 문학관을 어렵잖이 파악할 수 있다.


간단히 그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두 개의 동심원의 이미지"라는 비유

"현실의 인물들의 집단과 힘의 작용을 훨씬 더 잘 파악하게 해준다"거나 "현실의 인물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 그들과 유사한 다른 인물들을 만들어내어 그들 종족의 한 표본이 되게 한다"는 설명 등


   그런데 상기의 구태한 문학관이 문제시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진부함으로써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정적인 잘못은 다름 아닌 자신의 글 속에서 감추어지지 못한 채로 여과 없이 드러나는데, 예컨대 다음의 문장을 보자.


"발자크는 현실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일어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재현의 이론에서 하나의 문학 또는 예술 작품은 끊임없이 실재와 대비되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제아무리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현실에 어떠어떠한 바를 부가할 수 있다는 언급을 덧붙일지언정, 결국에 원형으로 선행하는 실재가 반영 자신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 반해, 반영은 그의 현실에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존재론상의 해소할 수 없는 위계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실상 모든 반영의 미학이 어떠한 종류의 실천/작용/곧 목적론을 전제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탓에, 그러지 않고서는 저 존재의 마땅함이며 설 자리를 도저히 변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반대로 소위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는 현실이 일반적인 사고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리하여 고전적인 시야를 견지한 작가는 - 혹은 독자라 하더라도 - 그 또한 보다 전통적인 기예art의 개념으로 회귀하게 되고, 그는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 작업인의 시각을 갖게 되며, 내가 읽은 뷔토르 역시 이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뷔토르가 평생에 걸쳐 이토록 진부한 문학 이론을 간직해 왔었다면, 그리고 그의 불멸의 걸작 <변경>이 새로운 당대의 현실을 '서술'하고자 한 작가의 노력에 불과했었다면, 만일 그러했더라도 그 한 권의 소설을 너무나도 감명 깊게 읽었던 지난 나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단 하나 중요한 성질인 독립성을 - 심지어는 그의 창조자로부터라 할지라도 완전하리 탈출해 버리는 무관함의 힘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토니 타키타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