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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May 29. 2023

영화 아키츠 온천과 이어지는 후나하시 아츠시와의 인터뷰

   지난 주중 어느 날, 나에겐 생소한 감독 요시다 기주의 한 영화와 함께 그에 관한 또 다른 일본의 영화감독 후나하시 아츠시 씨의 짤막한 강연이 있으리란 소식에 문득 혹했던 나는 간만에 집 근처 영화관을 찾음으로써 모처럼의 기회를 가만 내버리지 않았다.


   본 영화도 재미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고 - 만일 영화 자체 혹은 그것을 수용하는 내 감각에의 잔상을 단순히 서술하고자 한다면, 이는 곧 쓰여질 무엇인가 전제하는, 나로서는 결코 원치 않을 의도를 실현함에 있어서도 마땅치 못할 뿐 아니라 한낱 묘사의 대상이 될 영화에겐 자칫 무례한 짓일 테다 - 다만 상영이 끝난 후에 연이어 재생된 후나하시 아츠시 씨와의 수십여 분 인터뷰 영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녹음되고 또 녹화된 이라는, 지금 내가 쓰는 글과 실로 호환성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도 가히 적절한 탓에 짧게나마 덧붙이고 싶었다.


   인터뷰란 방식에서 드러나듯 영상은, 요시다 기주 감독의 영화들 중 몇몇을 선정하여 수일간에 상영하는 이번 프로그램의 기획자가 인터뷰어를 자청하며 물음을 던지고 화면상의 반대편, 그러니까 가운데 벽을 두고 오른편에 있는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이 그에 대해 답을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화의 형식이 무색하게도 그는 되려 자유롭게 이날 강연의 주제가 된 감독과 그의 영화들에 관하여 아마 본인이 생각하고 구상했을 순서에 따라 이야기했다. 확실히 그 편이 나았을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감독은 마치 본인이 저 혼자 영상을 찍은 듯이, 조금은 비약하자면 그가 전에 책이나 논문을 썼을 때처럼 전반에 걸쳐 짜임새 있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에 답을 하는 매 단절된 조각마다 대체로 한 가지 키워드를 - 서로 무관한 듯하지만 종국에는 하나의 큰 주제로 아울리는 그것들을 연거푸 제시하며, 적어도 영상을 보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일련의 키워드란, 여기서 몇 가지를 나열하자면, 영상의 <다의성>, <보는 행위의 아나키즘>, <보여주는 영화>와 <보여지는 영화>의 구분, 그리고 질 들뢰즈가 말했다는 <무규정 공간> 등이겠다.

   먼저 영상의 <다의성>이란 말 그대로, 두 명의 영화감독이 동의하듯이 영화를 다른 일반적인 영상 모두와 구분 짓는 결정적인 성격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한 가지 해석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러니까 친숙한 예를 들어 뉴스나 홍보를 위한 촬영물이 무언가 노골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오직 그것을 전달하기 위함이란 목적 아래 조직되고 또 기능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이 타당할 것임에 반해, 영화란 이렇듯이 한 가지 주제를 운반하는 단순히 잘 꾸며진 용기가 아니고 그 주제라는 것조차 어디서도 구체적인 실체를 발견할 수 없을 터이므로 영화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우리가 그리 배우는 것마냥은.

   이때 영화의 제작자와 영화 자신, 그리고 그 영화의 관객 사이에 놓인 권력 구조는 필시 <아나키즘>일 수밖에 없다.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시선에 영화의 제작인은 물론이고 영화 자체라 할지라도 일체의 간섭/통제를 할 수 없고 또 그런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두 감독의 공통된 견해이었다. 이를 위해 요시다 기주는 첫째: 물리적 형식성의 차원에서 당대 영화들의 정형화된 양상을 복제하기를 거부하였고, 둘째: 보다 포괄적인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규범화된 해석을 수용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이 설명하길, 일종의 반(anti)영화 - 예컨대 오늘 본 <아키츠 온천>은 반-멜로 혹은 반-로맨스라 하겠는데 - 곧 부정의 형식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내용은 어떠한 층위에서건 시대의 일방적인 해석을 거부하였다(승자의 역사, 가부장제라는 테마).

   한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기존 전제의 반명제란 일념에 사로잡혀 작가가 그 자신 독자에게 일방적인 해석을 강요할 수 있다는 위험이다. 만약 그리한다면 그것은 발음이 같은 두 한자의 의미가 암시하는바 기껏해야 절반의 탈피/부정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에 요시다 기주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영화에서 확고한 의미를 내보이지 않는다. 영상을 빌려 후나하시 아츠시가 언급한 <보여주는 영화>와 <보여지는 영화>의 구분은 바로 이 점을 근거로 하는데, 그에 따르면 요시다 기주는 보여지는 영화를 제작한 역사상의 몇 안 되는 감독이다 -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에는 영화를 감상하는 독자의 태도가 좀 더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작가에게도 지분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질 들뢰즈가 말했다는 <무규정 공간>, 후나하시 감독은 이를 영화 전반의 흐름(그것이 줄거리이든, 주제이든, 영화 속 시간이나 공간상의 연속성이든)과는 무관하게 곧장 눈앞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숏(shot)이라 설명하는데, 이 개념이 그 또한 '무규정적'일 것이 아니라면 해당 강연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를 파악하고자 <보여지는 영화>란 상기의 개념에 기대는 편이 유용할 법하다. 무엇인가 사전에 결정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라는 영화, 곧 <보여주는 영화>와는 달리 <보여지는 영화>에서 감독이 택하는 전략은 의도된 모호함이다. 여기서 모호함이란 줄거리, 주제의식, 또는 전통적인 해석 이론에서 목적의 자리에 놓일 법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계할 수 있다. 이를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자면,

"A는 B를 드러낸다."
A는 실물인 영화 자체, 즉 보여지고 들리는 영상과 음성을; 반면에 B는 상술한 줄거리를 포함하여 영화로써 그려지는 일반적인 대상을 대변한다.

그런데 <보여지는 영화>에서의 상황은 위 명제 중 B의 자리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영향으로 기존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변화하는데,

"A는 (B를) 드러낸다."

이 같은 목적어의 부재에서 야기된 문장의 불완함을 해소하고자, 두 가지 결정적인 변화가 다시금 일어날 수 있다. 정확히는 숨겨진 동사가 조명되거나 또는 기존 동사의 성격이 변화할 수 있다.
 
"A는 존재함으로써 (B를 드러낸다)." 혹은 "A는 드러난다."

따라서 감독 측의 의도된 모호함, B를 지우기란 오히려 남아 있는 A의 무한한 강조로 귀결된다. 게다가 더 이상 A에게는 아무런 역할의 제약도, 곧 전체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어떠한 구속력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진정으로 무관하게/무규정적으로/돌출된 예술로서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영상의 마지막에 들뢰즈의 이 말을 덧붙인 것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이 자체적으로 예술의 정의에 대해 능히 타당한 의견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당일 사용된 맥락에 있어서도 그제까지의 전 내용을 포괄하고 요약하며 또 응집성 있게 결속하게끔 모아주었기 때문에. 하여간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약 한 시간가량을 더 쓰고 온 것이 조금도 아쉽지 않을 만큼 보람 있는 강연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야만 겠다.


   

PS.

또 하나 끝으로, 내가 위의 글을 쓰게 된 진정한 계기로서 앞에 놓인 모든 것은 - 물론 영상을 보면서도 간략한 메모 정도야 남길 생각이 있었지만 - 그럼에도 핑계이고, 이렇게 단편을 씀으로써 어쩌면 몇 명의 독자와 또 언젠가 이러한 경험을 완전히 망각해 버릴지 모를 먼 훗날의 나에게 보여주고 공유하고픈 이날의 사건은 : 인터뷰의 막바지,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이 요시다 기주가 생전 한 마디를 읊으며 마무리할 때에 일제히 번뜩이던 카메라, 불현듯 곳곳에서 환히 밝히는 조리개의 시선이 까딱이는 소리, 꼭 수업시간 같이. 정작 가장 흥미로운 말들은 앞에서도 나왔을지 모르는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교사의 언지에 급급히 주의를 기울이는, 맨 뒷 줄 - 그중에도 가운뎃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의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그것이 어렸던 날 교실 풍경 같다는 생각에 그만 미소 짓지 않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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