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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Aug 09. 2023

게임 - 예술


이하의 글은 '비디오-게임'과 그에 관한 경험을 소재로 합니다.


   얼마 전 또 한 번 학기를 끝내고 난 그간 내버려 둔 스팀 라이브러리의 긴 세월 먼지 섞인 게임들을 훌 털어내며, 개중에 몇은 반듯이 닦아 실행에 옮기고, 이전 같았더라면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내가 어렸을 때엔 "예술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새 시대가 자부할 예술의 형태임에 틀림없다"며 그러나 어찌 영문도 모르는 체 속내 소리쳤을 저 생각이 문득 스쳐가는 바람에 다시 힘없이 보라 그때처럼 스러지지 않고자 성인이 된 이 날 볼모로 글을, 필시 달아날 사고의 형틀을 남기려는 결심에 글을 쓴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따금씩 마주했던, 그리하여 아직 어린 내 감수성을 자극했던 담론 : 즉 예술의 한 장르로서 게임은 마땅한가에 대한 그 논의를 어쩌면 순전한 우연함의 결과로, 하지만 여기 그럴싸한 인과성을 가정할 때 - 첫째 그것이 공중에 자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졌기에; 혹은 둘째 오늘날 '예술'이란 명명이 가지는 권위의 한도 없는 추락에 힘입어 듣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아마도 둘 모두가 대중의 심리 현실에 적잖이 부합하리라 생각하는데, 게임이 어느덧 유력한 문화 유형으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 그는 스스로를 예술이라 자칭하기에도, 예술이란 간판 없이 떳떳이 구는 데도 별반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물론 게임에 진정 어린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렇지만 익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칫 지난날의 주제에 억지로 부연하자면, 흔히 예술적이라 칭송받는/간주될 게임들은 언제나 1인칭이나 3인칭의 슈터, 실제로 총을 쏘진 않더라도 소설이나 영화의 전통을 기술의 성대함으로 놀랄만치 확장한 '이야기-예술'에 국한되는 듯하다. 당연하게도, 한 곳에서 이미 충분하리 정립한 기준을 그와 똑 닮은 다른 곳에 겹쳐보기란 어렵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게임이란 범주 내의 형태상 변양이 너무나 다양하기에 만일 대중적인 예시를 들어 <바이오 쇼크>가 그 자체 예술이라면 <피파 13>도 예술일 것인가? 여러 <젤다의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슈퍼 마리오> 게임들도 단지 고전이란 이유로써 막연히 예술이라 대접받을 것인데 그에 관한 일관성 있는 변증이 가능할 것인가? 더 극단적인 사례로서 <테트리스>, <팩맨>과 같은 게임들을 마주한 변론가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후술한 사례들을 단순히 논의에서 배제하기에는 부당할뿐더러 찝찝함이 남는다. 비단 "FPS나 TPS, RPG 등 각각의 하위 장르는 예술이다"라는 볼품없는 주장만을 내세울 게 아니라면, 대신에 진정으로 포괄적인 광의의 '비디오 게임' 전체의 예술성을 논증하고자 한다면 게임이란 집합 아래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일련의 성격을 정리하고 비로소 이를 바탕으로 시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의 공통된 성격에 관하여 흔히 거론되는 요소라면 놀이-곧 그것의 목적, 그리고 상호작용성-곧 그것의 형식이 있다.


(물론 그 밖에도 예술 자체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게임의 범주가 과연 이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겠다. 예의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 나 또한 이 같은 '하향식'의 논리를 선호하지만, 얼핏 찾아본바 이제까지 거론된 주장의 다수는 외려 '상향식'으로 전개되었기에 또한 그것이 오늘의 본래 주제이기에 여기서는 후자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1. 놀이

   

   그 누가 게임의 본질(이제는 한낱 사물에 적용하기조차 우려스런 이 과잉된 표현을 다만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양해해 주기를)이 놀이라는 데 토를 달 수 있을까. 특히나 게임에 관해서라면, 그 밖의 목적을 가진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게임의 예술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 그 아래 전 대상들이 다 함께 공유하는 여럿 성질들 가운데 유독 놀이임이 부각되는 것은, 물론 그것이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의 '기저'에 내포되어 있으리라, 다만 여러 가능한 성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그 마땅한 정의와도 관련될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 까마득한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추측할 수밖엔 없는 시나 노래와 회화에 이르기까지 '놀이'란 전 예술의 정립된 통시적 정체성에 적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혹자는 그것이 해당 개념/집합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도 단언할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놀이라는 게임의 한 성격이 - 그것이 정말로 필수적인가를 차치하고 - 이 집단을 무려 예술의 한 장르로 격상시킬 만큼의 그런 확고부동한 타당성을 지니는가? 아니면 명백한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현재로서는) 무수한 현실의 사례들을 제쳐두더라도 그것을 가뿐히 부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그토록 빈약한 논리였음이 드러날 것인가.   


   어릴 적 내 부모님의 서재의 한 선반 위에 꽂혀 있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란 책이 아직도 발휘하는 반 잊혀진 기억들과 어째서일까 유명해진 호모 루덴스의 개념이 막연히 내 머리에 투사하는 이미지에 미루어 보았을 때, 예술에 있어 놀이임이 갖는 역할이란 크게 두 가지 - 먼저 그것이 현재의 양상으로 존재함에 대한 단지 인과적 관계 설정의 차원에서 역사적 맥락의 형성이고, 그에 더해 뭇 사물들의 잡다로부터 예술 대상을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경계 지음이다. 전자의 '사실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무어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것의 단순한 사실성이 대상에 대한 특정한 관점의 우위를 수반하는 것은 또한 아니다. 예컨대 그리스나 로마 건축 양식의 도드라진 양식성이 그 기원일 목조 건축의 원리와 필연적으로 관련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실제 그리스 신전이란 대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하간 상기한 두 목적들 가운데 후자에 관하여 그것을 전적으로 내재적인 논리로써 달성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예술의 자명한 정의에 놀이임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응당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수밖엔 없다. 그러므로 수평적인 관점에서 현재 모든 예술이 놀이의 큰 범주에 포함된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발견하거나 혹은 수직적인 관점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전 예술의 기원에 놀이가 위치함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나의 생각에 이와 같은 개념화의 작업이란 마땅히 수평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릇 개념화란 언제나 하나의 평면에서 - 이를테면 현재라는, 사고의 현시점에서 고려되는 동격의 전 사물들을 대상으로 선으로써 구획을 표시하는 일이므로. 구태여 비유를 더하자면 100년 전의 국경선이 오늘의 지도를 그리는 데 무의미한 것과 같겠다. 물론 역사가 적절한 명분으로 기능할 수는 있겠으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경선을 긋는 그 시점에서 영토의 실제 소유이니까. 그리하여 예의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두 번째 목적마저 자동적으로 달성하려 한 시도는 무위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의미를 거세했을 때, 남는 것은 하나의 재미난 '사실' 그뿐이다, 수많은 재미난 사실들 가운데에서. 단지 예술과 놀이의 공통점이 존재함을 내세우는 것은 예술과 기술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수평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과연 놀이가 예술의 전 대상을 포함하는가, 혹은 그렇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이 상정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할 것인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말했다시피 영화나 사진과 같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예술 장르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모호한 두 개념의 포함 관계에 있어 무엇이 아니라는 근거를 대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에 각자에겐 일종의 선택권이 주어지는 셈이다. 혹자는 알려진 예술의 한 측면만을 부각하여 일례로 그 연마되는 기술적 성격을 강조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성스런 의식과의 총체적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이란, 이렇듯 예술의 기원으로 정당하게 제기되고 나아가 예술 일반의 제1 원칙으로 공표될 갖가지 후보군 가운데 저 홀로 차별화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무상성이다. 어째서 무상성인가? 이는 무상성이야말로 인간의 다른 모든 행위 일반으로부터 놀이를 구분하는 것이고, 놀이의 이 독특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잇따라 정의될 예술에게도 고결한 방벽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놀이의 자유로움과 비결정성, 막연함은 제 자신을 일체의 목적을 초월한 행위로서 보이게 할지 모른다(단, 여기서 목적이라는 말이 진부하게도 자본주의 혐의를 드리운 재화의 형성이란, 말하자면 생산성의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겠다. 이데올로기로서 목적론은 어쩌면 더 뿌리깊은 인식론적 변화의 한 현상에 불과할 자본주의가 세상에 드러나기 한참 전부터 인류의 각 사회를 지배하는 일반 사고였을 것이므로). 문제는 실상 오늘날의 관점에선 놀이가 더 이상 특수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놀이가 "그저 재밌어서 하는 것"이라 정의된다면, 과거 인류 역사의 한 시절 방점은 '그저'라는 수식어에 찍히고 따라서 위대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어떠한 목적을 전제하는 모든 활동과 일거에 구분되겠지만, 이른바 인과론의 시대에 요점은 '재밌어서'로 옮겨져 이곳에서 '재미'란 무목적성이라거나 자유와는 전혀 무관하고 오히려 식욕이나 수면에의 욕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다만 높은 지능을 보유한 어떤 동물 종의 한 가지 행동 양식으로만 이해될 것이다. 오늘날 예술을 정의함에 있어 '놀이임'이 가지는 무력함은 상술한 바와 같다.



2. 상호작용성


    다음으로 고려할 게임의 보편적 특성은 '상호작용성'이다. 그것이 다른 예술 장르에서 동일한 표현이 통상적으로 지시하는 바와 무엇이 다른지, 이윽고 그것이 어떻게 예술 속 게임이란 장르의 특수성을 형성하는지를 생각해본다.


   일반적인 예술 이론에서 상호작용이란 예술적 대상이 일종의 매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문학에서 글이 그러하고, 회화에서는 이미지, 영화나 극에서 장면이란 임의의 단위가 그러하듯이 예술의 물리적인 형태란 일정한 내용을 담는 용기이다. 이것이 익숙하리만치 고전적인 예술 이론에 대한 요약이겠다. 그런데 상호작용이란 예의 도식(독자 ← 예술 대상 ← 의미)에서 화살촉의 방향이 거꾸로도 향할  있음을 뜻한다. 그러니 작가의 의도에 기인하여 사전에 고정된 의미가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자 편에서도 본인이 수용하는 의미를 선택하고  생성하는 것이다. 이때 본래의 예술 대상은 그의 현상적 존재감을 거의 상실하면서까지 철저한 매체로서 기능하게 된다 - 관계의 주체가 도식의  극단에 위치하므로 중간의 경로이자 통과물인 대상은 희미해  수밖에 없다, 투명화한다고 해도 좋을까? 예술 일반에 있어 상호작용을 거론할  흔히 떠올리는 바는 위와 같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 상호작용은 훨씬 더 직접적인 감각의 대상인 구체적인 물질성에 관여한다. 한 번이라도 게임을 플레이해 보았다면 아주 당연한 바이지만, 그것이 독자인 나에게 발하는 심상은 나의 의도된 조작에 상응하여 변화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게임의 거의 모두가 시각을 주된 수용의 감각으로 거기에다 때때로 소리란 요소를 부가하기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감상하는 나의 손짓 하나하나에 게임이 보여주는 이미지이자 게임 그 자체는 완전한 그리고 아주 분명하고 단순한 인과성의 원리로써 변모한다. 물론 여기 게임의 제작자에 의해 사전에 구축된 일련의 규칙이라는 명시된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처럼 독자의 수용 행위가 예술의 '물리적인' 성상을 그토록 명백한 인과성과 그것에의 충실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게임의 상호작용성이란 뭇 예술에서와는 달리 독자에서 대상의 방향으로 전적으로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영향력이 실재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같이 비길  없는 독특함이 그것만으로 게임을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어떤 장르의 특수한 성격이 예술의 일반적인 개념이나 이와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없는 그것의 수용과 갖게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은 언제건 유익한 일일 테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앞서 보았던 예술의 도식이다. 고전적인 예술 이론에서 오직 하나의 극점,  예술의 내재적 의미가 강조되었고;  번째로 언급한 상호작용성의 도식에서  극단의 주체 - 기존의 의미에 더해 독자의 능동적 역할이 강조되었다면; 마침내  번째, 게임만의 유별난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도식에서는 상호작용의 직접적인 객체로 대두된 물리적 예술 대상이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점이 게임을 현존하는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자체 예술적인 사물로서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에 있어 - 특히 근래에 등장한 소설이나 영화, 사진과 같은 장르들에서 - 직접적인 수용의 대상(쓰여진 바로서의 , 촬영된 바로서의 이미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에 대한 해석(이러한 표현 자체가 그것이 예술 대상에 귀속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 개개인 정신적 작용의 산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만이 중시되는 것을 본다. 예사로  편의 영화를 보고나서  줄거리  인물들의 정신분석적 콤플렉스에만 천착하는 독자는 정말로 영화를 감상했던 것인가 아니면 마치 아마추어 학자 같은 자세로써 본인을 감동시킨 이론 A를 아무렇게나 손닿는 데 덮어씌운 것뿐인가. 차라리 의미를 자아내는 독자의 주체성이 고려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감상이 일괄적으로 예술 그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라 가정할 수나 있었을 텐데. 이 같은 상황에서 게임의 독특한 상호작용성이 혹여는 아름다운 대상으로서 예술의 '대상성'(인식의 주체에 의해 주목받는다는 의미에서)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게임을 실제로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즉각 지적하려 할 것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많은 시간 동안 그것은 거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사회적인 통념의 결과일까?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았을 때, 보다 큰 문제는 역설적으로 특유의 상호작용성 - 그로 인해 감상자를 자신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성질에 있다. 어떤 대상의 대상성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식하는 주체와의 구분, 곧 분리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 적합한 실천적 태도를 '관조'라고 호명할 수 있겠다. 달리는 인식의 주체가 대상을 그저 바라본다고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인식하는 것' 외에 방해가 될 만한 일체의 작용이 배제됨을 의미한다 - 관념적으로, 그것 이외 일련의 행위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하자면 예술의 감상, 즉 관조하기에 있어 고려되는 것은 인식의 주체인 나; 인식의 객체인 예술 대상과; 둘 사이의 관계인 인식.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예술을 마주하여 그렇게 하기로 각자를 적응시킨 문화적 양식을 떠올려 보더라도 분명한데, 감상자의 손발은 꽁꽁 묶인 채로 저만치 존재하는 대상과 그의 감각 기관 사이에는 오직 무가 가득 차있다(극장의 어두운 공간이나 전시관에서 고요함의 매너. 독서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취미 중 하나라는 사실과 음악 감상의 기술이 점점 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을 가리키며 발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다. 즉 그곳엔 아무것도 없을지언정 감상의 주체와 예술 사이에는 양자를 절대적으로 떼어놓는 허무의 공간이 존재한다. 상기한 극장이나 전시관, 독서 등의 상황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체의 감각기관이 스스로 발하는 소리 - 이명 내지 환청과는 단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게임에서의 상호작용은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특히 신체적인 조작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주체의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순수성이, 따라서 주체와 대상 사이 선명한 간극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 밖의 어떤 예술에 집중할 때 보다도 게임을 플레이할 때 더욱 몰두하며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 : 게임을 조작하는 나의 동작은 게임이 상연하는 이미지와 구분할 수 없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나는 게임 속 가상의 플레이어와 쉬이 동일시된다 - 예로부터 조작자/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시점의 게임이 드물지 않았음을 상기해 보자. 비단 FPS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퍼즐 게임, 또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서.



3. 마치며


   이상으로 게임의 주요한 두 특성으로서 '놀이임'과 '상호작용성'이 게임의 예술성 여부와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론적으로는 두 가지 모두 그것이 예술임에 별반 기여할 수 없음이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부적격하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음악이 청각이란 - 시각에 견주어 가히 보잘것없는 분해능의 감각을 제 주된 수용성으로 삼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이란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듯이. 결국에 중요한 것은 도대체 어떠한 사유로써 게임이 예술로서 인식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앞서도 말한 바 있듯이, 이를 위해서는 게임이란 한 장르에 국한된 특수성이 아니라 예술 집합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적 성격이 거론되어야 한다. 즉, 하향식의 논리로. 그렇다면 다른 예술 장르들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제와서 타 장르의 역사를 거론한다면 우습겠지만, 저마다의 독특한 형태를 기준으로 한계 지어질(그것이 역사상의 다른 시점에서는 예컨대 역할이나 기능과 같이 상이한 방식으로 정의되었을지라도) 사물들의 집합이 일괄적으로 예술이라 불리게 되는 과정에 일종의 규칙성이 실재한다면, 현재로서 게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를테면 전(pre)-예술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앞서 장황하게 언급한 게임의 두 특징으로서 놀이임과 상호작용성은 실상 게임만의 성질이라기 보다는 오늘날 확립된 예술 장르들이 한 때 도맡았던 역할을, 총체적인 인식망 속에서 옛날 그들의 지위를 떠올리게끔 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어떠한 문화권에서도 존재하리라고 확신에 차 이야기할 춤과 노래의 의례에서 두 가지 특징을 모두 발견하게 될 것이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또한 잘 알려진 바는 그러한 춤과 노래, 시와 소설, 영화와 회화, 그 외 모든 장르들이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언젠가 그들이 원초적인 흥미로움을 상실했을 때, 본래의 기능과 목적성을 상실하고 다만 무색하고 고립된 대상으로 변모하였을 때, 그러니까 비로소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정제된 대상으로 남게 되었을 때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아직 지나치게 어리다. 그것은 과도하게 현란하고 너무 많은 육신의 활력을 빼앗아 간다.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관조하기에 부적절한 대상이다. 그것이 예술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실은 게임을 독립된 예술로서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바를 고백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마냥 비관적인 현재 속에 연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자신의 고유한 혹은 통상적인 과도기 예술의 성격으로써, 또 이를 극대화한 구현하는 기술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써 게임은 그의 잠재적인 독자를 유례없이 긴 시간 동안 오직 자신을 마주 향해 붙잡아 둘 수 있는 독보적인 장르로서 자리 잡았다. 기껏해야 수 분을 넘지 못할 회화의 감상, 길다면 수십여 분 지속될 한 곡의 음악이나, 수 시간이 제 물리적/정신적 한계임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영화를 넘어서. 단 회의 감상에 곧잘 수십여 시간이 소요되는, 그러면서도 독자의 계속된 집중력을 온존히 유지시킬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장르가 바로 게임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게임을 정의하려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아직은 보편적인 예술의 장르로서 인식되지 않았지만(비단 일반 대중들에게서가 아니라 게임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특히나 최근에 제 자명한 목적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지함에 귀의하려는 숱한 사례들을 볼 때에면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란 어렵지 않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단순한 재미를 위하여 소비하는 대중들은 여전한 다수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일부 그의 순수한 대상성을 떠받드는 신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다만 여기 그 미래의 신자들 중 한 명으로서 진정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의 예술로의 승천이 영상 문학의 아류라는, 영화가 이미 지난 협소한 길목에 이르러 주저앉지 않기를. 또 하나 덧붙이자면 그 가진 모든 면면을 언젠가의 인식이 포용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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