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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Oct 14. 2023

소녀 구라스와 여덟 개의 산

   어김없이, 영화제의 계절이다 - 어제로 막을 내리기까지.


   운 좋게 부산에 살고 있는 나이지만 재깍 예매하지 못한 탓에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힌 영화들은 매진되기 일쑤였고 간신히 수 편의 입장표를 구할 수야 있었다. 하지만 불평할 것 없다. 이처럼 흔치 않은 계기로써 그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서 앞으로 볼 영화들을 고르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재미난 놀이이고, 혹여나 개중에서 몇몇 참신한 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성공일 테니까. 저번에도 그러했고 전전번도 그랬듯이. 만일 누군가 영화를 보고 나와 어느새 사라질까 아슬한 즉후의 감상을 글로써 붙잡아두려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면 - 그것이 긍정적이었건 부정적이었건 간에, 상영이 종료되기 무섭게 폰을 켜고 메모를 남기려는 습성 - 이는 영화의 감상이 그에게 대단히 가치 있는 시간이자 경험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를 찾은 행운은 <소녀 구라스>였다.


   우선은 줄거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영화는 크게 두 이야기를 축으로써 형성된다. 하나는 구라스의 가족을 포함하여 소두구를 기르는 농부들, 실상 등장인물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으로서 그들 삶의 여건 - 구체적으로는 수확한 소두구의 판매만으로는 여의치 않아 꾼 돈을 갚기 위해 소를 팔아야 하는 구라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 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전적으로 주인공 구라스 개인의 것으로서 집에서 기르던 개 "팅클"의 실종을 해결하기 위한 모험을 주제로 한다. 당연하지만 두 이야기는 전혀 독립된 것이 아니며, 전자의 압력이 후자를 시종일관 간섭한다(예컨대 구라스가 "팅클"을 찾기 위해 옆 마을로 향하는 것을 제한하는 아버지와 선생님의 역할). 특히 전자의 이야기가 가장 높은 밀도로 응축된 인물인 아버지가 후자의 주인공인 구라스의 모험을 마지막까지 방해하는 인물이라는 점, 그가 소두구를 판매하기 위해 마을에서 떠나자마자 구라스는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여정을 출발하여 결국에 그 결실을 맺는다는 점은 상기할 만하다("팅클"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모험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당초 유일한 목적이었던 자신의 추측이 틀렸음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저의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모험의 실패 또한 가능한 모험의 결말이므로).


   얼핏 특기할 점은 없으며 이미 수 차례 보여진 바 있는 - 극단적으로는 영화 <판의 미로>에서처럼, 소소하게는 앞으로도 꾸준히 교과서에 실릴 법한 소설의 고전들을 연상시키는, 말하자면 서사의 전범에 가깝다 생각되는 줄거리이지만, 틀에 박힌 전형성이 훌륭하게 구현되었을 때 그 역시 아름다운 양식성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여러 사례를 들어 알고 있고; 중첩된 이야기 간의 균형 감각과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의 모험심에 우위를 부여하는 감독의 선택에 호의를 갖지 않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고, 더구나 모든 뛰어난 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이 요소란 바로 영상의 논리적 정합성이다. 그 외 인물들 단독으로는 부여받지 못한 모험적인 장면들이 소녀 구라스와 함께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단 마법적인 장면들 - 눈 깜박할 새 사라진 달걀 두 알이나 꿈에 나온 수도승을 실제로 만나는 씬 - 뿐만 아니라 모험의 도정 그 자체를 묘사하는 장면, 가령 상당한 원경에서 인물의 이동을 그저 담고 있는(그것이 인물의 이동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 인물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상에 도드라지는 요소가 아니다) 익스트림 와이드 숏이 모험하는 소녀의 현전을 전제로만 제시된다. 특히나 영화의 막바지, 그 자체가 마법적 사건인 꿈에서 만난 소승과의 독대(여기 그간 동행했음에도 어머니가 낄 자리는 없다) 이후 금세 원경으로 이동하여 어머니와 함께 마을로 귀환하는 구라스를 그려낸 대목을 이 영화의 백미로 꼽겠다. 최후의 쇼트에서 '불가해'한 구라스는 안개 낀 배경 속 그녀로부터 점차 멀어지는데, 그 기저의 논리는 아주 일관되며 분명하다. 오직 일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모험의 주체란 낯설고 이해할 수 없기 마련인 것이다, 설령 그 여행의 종결점이 일상으로의 복귀라 할지라도, 마치 관객들이 소녀의 꿈속에서 본 적도 없는 수도승을 마주하며 느꼈을 느닷없음의 감정처럼. 같은 맥락에서 구라스가 소승에게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여달라고 한 이유 또한 명백하다. 



   그런데 이 같이 생각이 흘러감에 따라 또 다른 - 실은 전혀 관계없는 영화 <여덟 개의 산>을 떠올렸다. 


   단지 인적 드문 산이라는, 그리고 목축업에 종사하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어려운 형편이란 공통의 소재에 기인해서가 아니라.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듯 내 이목을 끄는 것은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위엄한 경관도, 여덟 개의 산에 관한 우화가 그 영화의 줄거리와 관계하는 상동성도 아닌 영화가 제 살을 펼쳐 보이는 방식이다.

 

   누구나 첫눈에 알아볼 사항은 영화가 땅딸막한 고전적 화면비를 사용했으며, 그로써 마치 옛스런 필름에 찍은 영상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특징적인 설정과 그것을 시종일관 지속하는 것은 더 광범위한 포괄적인 심상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말해 그 영화는 보는 이의 눈 속에서 한 권의 그림책을 그려 보인다(그것은 꼭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하다), 다만 "그런 듯이 보인다"의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스크린과 자그마한 종이책의 차이가 아니었다면 둘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이렇게나 독특한 심상을 촉발한 마술사-감독의 전략을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상영이 끝나고 난 후에도 계속된 궁금증의 고찰은 나로 하여금 몇 가지 기억의 파편들을 되살리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벌써 한 달이 된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어 짤막하게 쓰고자 한다. 바로 고정된 카메라이다. 상기한 화면비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고집스레 카메라를 정지한 채 그곳에서 인물들의 움직임마저 최소화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꺼번에 다수의 역동성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 개별의 속도 또한 지나치지 않게 한다. 이러한 전략의 효과는 마치 고정된 배경(영상이라기보다 정적인 사진이나 그림처럼 느껴지는)을 바탕으로 한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그들의 절제된 동작 역시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가려지게 만든다. 기억하기로는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이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은 빈번했을 것이다. 그렇게 빈번했기 때문에, 부가적인 효과로서, 어쩌다 등장하는 역동적인 쇼트 - 일인칭의 카메라로 등산하는 주인공의 등을 좇는 그 장면이 그토록 극적으로 와닿을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또 인상 깊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 적어도 영화관을 찾을 때엔 그 밖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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