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졸업식을 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덧 입사한지 8년 차가 되어있었다. 나이도 서른다섯이 되어, 언제까지고 이십대 초중반으로 있을 줄 알았지만 벌써 마흔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쯤 되면 같이 대학을 졸업한 동기들이나, 친구들도 모두 같은 상황에서 물심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겠지만, 그 와중에도 쉼없이 청첩장이 날아드는 걸 보면 다들 한 걸음씩 착실이 전진하고 있구나, 싶어 격려의 박수를 치게 된다. 동시에 결혼 소식 다음으로 많이 들려오는 퇴사 소식은 때때로 안타까움을 자아내, 남일 같지 않은 감정으로 술 한 잔과 함께 진심으로 공감해 버리기도 한다.
기세를 몰아 일보 전진인지, 권토중래를 위한 일보 후퇴인지의 기로에서──, 그러고 보면 삼십대의 중반을 잘도 헤쳐나가고 있구나 우리.
주말이 시작되고 잽싸게 제주도로 잠깐 도망쳤었다. 길지않은 여정에 함께 할 책을 한참 고민한 끝에 두 권을 골랐는데, 악천후에 비행이 지연되는 탓에 출발도 하기 전에 공항에서 그만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아차 싶었는데 이미 읽어버린 책을 읽지 않은 걸로 할 수는 없다.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니 공항이라는 곳이 새삼 넓게 느껴져, 언젠가 읽었던 ‘공항에서 일주일을’ 이라는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가 생각나, 그 책에서의 공항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새록새록 하나씩 시야 속의 대상들에 퍼즐처럼 매칭되었다.
그러다가 이내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 틈에 사람을 좀비로 변형시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섞여 있어, 갑자기 저 멀리서 높은 옥타브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면, 어디로 도망치는 편이 좋을까. 들고있는 배낭에 캐리어에 이 많은 짐들 중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챙겨서 도망가야 할까. 활주로로 가는 편이 안전할까, 옥상으로 올라가는 편이 안전할까. 공항 밖은 안전할까. 아니, 나는 달리기 같은 건 잘 못하니까. 아마 금방 붙잡혀 잡아 먹히고 말겠지. 괜히 힘 빼지 말고 담담하게 저주스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한동안 진지하게 몰두해, 주위의 소리도 못 듣고 혼자 정신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겠지만 언제나 ‘만약에’ 라는 가정은 참 흥미로운 생각의 전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있을 리 없는 일을 가정한다는 건, 요컨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마냥 쓸모 없다고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런 엉터리 시뮬레이션에서 가정해 봤었던 비슷한 부분을 빠르게 다시 복기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진 않을 테니까.
비행기가 뜰 무렵엔 날씨가 더욱 악화되어, 비행기에 탑승하고도 30분이나 이륙이 더 지체되었다. 기내 안은 아기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아기가 울고 있다는 한 가지 현상에 대처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인 게 또 흥미로워서, 두리번거리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막상 이륙하고 나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좁은 자리에 꼼짝 없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 승무원이 건넨 오렌지 주스나 홀짝대며 책이나 신문을 읽는 게 전부였다. 남은 한 권을 반 정도 읽으니, 무사히 착륙을 하며 피잉-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지난 번에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끄적거려 두고는, 다시 생각해보니 누군가는 자신이 어엿한 어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괜한 말로 어른의 허들을 구름 위에 세워 두고 ‘어른 따윈 이 세상에 없어’ 라며 심술을 부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사람들만 가득 찬 세상이라는 건, 어딘가의 비극적 영화 속 세상 같아서, ‘아아, 이건 너무 염세적인 표현이었나’ 하며 아주 잠깐 반성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써의 나를 완성시키는 것’에 대해 정리를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이어, 지금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어른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인간으로써의 내 모습을 하나하나 늦지 않게 갖춰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른 다섯. 이 나이의 일반적인 인간 남성 표본의 외적인 모습이라면,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봐도 구색정도는 갖추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평범한 직장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조금 저축할 정도의 적당한 돈은 벌고 있다. 누추하지만 한 몸 뉘일 정도의 집은 있다. 틈틈이 독서와 어학공부도 하고 있고,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 블로그도 유지하고 있다. 적당한 취미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람으로써의 내 모습의 아주 일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책으로 비유하자면, 이건 책 표지 디자인 정도일까. 물론 표지도 책의 작지 않은 요소인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 중요하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당장 첫 페이지부터 시작될 내지는 과연 무엇으로 채워 넣을 것인가, 라는 부분에서부터 본격적인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첫번째로, (나라고 하는 사람은) 장르가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사람을 책처럼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딱 잘라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으로써의 장르는 요컨대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뭘 이루고 싶은 지, 이런 인생의 방향같은 걸까.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이거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야 엄밀히 말하자면, 있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변해왔지만, 그 결말에 최종적으로 무엇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아직도 청춘이라는 궤변과 다르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결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도저히 안될 정도로 많이 늦은 건 아니지만 냉정히 말해 늦은 건 늦은 거다. 나처럼 그다지 성실하지 못한 사람도 신경 쓰이는 부분을 하물며, 성실한 친구들, 무언가에 늦어본 일 따위 없는 사람일수록 이 부분은 크게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단순히 늦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저 말은 이번에 새로 시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라는 부분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궤도에 오른 지금에서 처음으로 내려가, 다시금 스스로를 쏘아 올렸을 때, 지금보다 더 높은 궤도, 꿈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계산과 그걸 실현시킬 각오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결정하지 못해 남아있는’ 부류라고 생각한다. 지금 서있는 이곳은 지금의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선택해준 곳. 지금의 나는 앞으로 어디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다.
도대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혹은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들어' 같은 느낌은 언제 어떻게 어떤 걸 계기로 느끼게 되는 걸까. 어째서 스스로의 길에 대해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서 그토록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럴 수 있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럽다. 걱정 많고 의심 많은 나로써는 절대로 지금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이 많다. 과거의 내가 정해준 대로, 지금의 내가 여기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이유를 미래의 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잘 갈무리해서 미래로 토스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지난, 반듯하게 닦인 이 길 위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이 길은 단지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찾아야만 하는지. 지금도 계속 써내려가는 이 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걸까.
스물 다섯의 내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것들을 마흔을 앞둔 내가 의심한다니. 참 우스운 상황이지만, 이렇기 때문에 책을 쓰기로 했었지. 새삼 깨달을 때마다 앞으로도 나는 스물다섯의 총명함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 여하튼 이런 고민의 흔적과 행동의 과정들이 인간으로써의 내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 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조금 더 정리가 필요한 건 분명하고, 늦지 않게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 내심 각오하고 있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는 어떤 내용을 채워 넣을 것인가에 대하여. 사실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할 필요 없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걸어왔고 걷고 있고 걸어갈 길에 대한 모습 그대로 인생의 각 페이지마다 빼곡히 채워질 것이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기록하는 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 뿐만 아니라 주위를 기록하는 일까지도.
그런 관점에서 이 부분을 일찍 깨닫게 된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정작 주변을 묘사하지 않고는 나라는 존재가 설명이 되지 않는 다는 걸 진지하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찍 알게 되었다. 근처에 항상 머무는 것들. 꾸준히 그곳에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말 없이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그 중심에 서있는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직접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보다 변명이 될 여지가 적기도 하고.
다만, 이 부분에서,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써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지금까지는 스스로의 인간으로써의 가능성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개선하는 사람. 이미 널리 쓰이는 무언가를 유지, 보수하는 사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걸 소비만 하는 생물. 요컨대 수학에서의 플러스, 제로, 마이너스의 개념이다. 이에 대해 아직 결론지을 수 있을 만한 윤곽은 갖춰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게 소망하자면, 조금이나마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쪽의 인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더라도 세 번째 유형 만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새삼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속물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사노 요코는 에세이에서 아이인 척하는 어른으로써, 아이의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하지만, 글쎄,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아이인 주제에 어른인 척 그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경고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현재의 나는 어디까지 완성되어 있는 걸까. 지금 해야 할 일은 도화지에 밑그림이 어디까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는 일. 아직도 한없이 어리숙한 내 모습에 밑그림이 그려져 있긴 한 걸까 고개가 갸우뚱 하지만서도.
이런 것들이 대한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시간은 착실히 흘러 이미 서른다섯에 다다르고 말았지만, 그것 조차도 사랑해 마지 않는 내모습이다. 완벽하지 못한 고찰 끝에 후회하고 반성하고 보완하고 개선해서 점차 완성해가는 자기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견고한 모습이야말로 사람으로써의 내 모습을 완성해간다는 것, 즉, 내가 갖출 수 있는 어른스러움이 아닐까.
… 적어도 구름 낀 제주도 해변 어딘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서른 직전의 나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