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겨울 어느 날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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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도심 한가운데, 파티룸에서 나오니 밝은 가로등 아래로 화려하게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머플러를 단단히 여미고는 덜덜 떨며 택시를 기다렸다. 코트 한 장에 대충 휘감은 머플러로 올 겨울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건 큰 착각이었을까. 새벽 두 시 역삼에서의 칼바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잠시도 버틸 수 없음을 여실히 깨달았던 어느 겨울날.
시기적으로는 아직 겨울의 초입일 뿐이지만, 매년 반복하고 있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추위는 매년 새롭게 느껴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무리가 짙게 드리워, 내일까지도 계속 눈송이를 쏟아낼 표정이었다. 습관적으로 왼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버스도 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고요한 시간. 가로등이 환한 역삼대로에는 이 시간까지도 오가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머플러 사이로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 대신 하리보 젤리를 조금 꺼내 입에 물었다. 원래는 담배가 있던 자리. 담배는 이제 없지만 아직 왼쪽 바지 주머니에 라이터는 언제나처럼 불룩하게 있었다.
어느덧 금연을 시작한 지도 두 달. 이젠 담배 대신 젤리를 찾게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 처음부터 젤리를 찾았던 건 아니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우연히 계산대 옆에 걸린 하리보 젤리를 보고는 그리운 시절이 떠올라 그만 캔맥주와 같이 계산해버렸던 것이 발단이었다. “말랑말랑하니 식감이 참 좋고, 적당히 달다. 여간해서는 녹거나 달라붙는 일도 없고, 손에 묻을 걸 신경 쓸 일도 없으니, 간식으로는 이만한 게 없지.” 라며 입버릇처럼 어째서 젤리냐고 묻는 지인들에게 설명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기침과 함께 튀어나와 버렸다.
그렇게 하나씩 집어먹다보니 지금도 여전히 젤리는 하리보 밖에 먹지 않는다. 뭐──, 씁쓸한 아메리카노와는 상당히 궁합이 좋지 않은 건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 것도, 조금 더 뒤로 돌아가 수영을 그만둔 것도, 피아노를 그만둔 것도, 경시대회에 끝까지 집중하지 못했던 것도, 한 번의 실패 정도로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해버린 것도. 여태까지의 바보짓을 하나하나 일일이 나열하려고 하면 종이가 얼마만큼 있다고 하더라도 모자라겠지만, 돌아보면 아직 겨우 서른도 넘기지 못한 내가 바보짓을 그렇게나 많이 했구나 하면서 실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정도면 바보 중에서도 구제할 도리가 없는 바보일지도.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일시에 풀어져버려, 침대에 눕자마자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일어난 주말 아침에는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요컨대 후회를 하는 게 바람직한 거라고. 후회하지 않았다면 그건 되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았든지 아직도 그 시절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든지 둘 중의 하나를 반증하는 건 아닐까. 무엇이든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후회로 남을만한 피드백은 생기기 마련이다. 조금이나마 넓어진 식견으로 과거의 문제를 한 걸음 뒤에서 다시 한 번 바라보면 또 다른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바둑의 복기처럼, 바둑판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이 승패가 결정되고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본 바둑판 위에,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길이 뒤늦게 보이는 것과 같다. ‘아차!’ 하고는 실수를 깨닫고 후회하지만 결과를 뒤바꿀 수는 없다. 다만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기억 한 구석에 깊고 선명하게 새겨두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당시에는 최선이었고 후회하지 않았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고 그걸 떠올리지 못한 건 경험의 부족이든 생각의 부족이든 나의 미숙함인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 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뿐, 그 다음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 어디서 후회될만한 점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건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흐린 하늘에 태양의 위치가 불분명했다. 새벽 내내 눈이 내린 덕인지 날씨는 한 층 더 추워져 있었다. 라떼를 마저 비우고 아메리카노를 다시 내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거실엔 은은하고 고소한 커피향이 가득했다.
먼 훗날, 인생의 막바지에 돌아보면 다채로운 후회들로 점철된 인생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스피노자도 그랬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렇게 후회로 남은 일들을 눈감기 전에 서재에서 한 권씩 느긋하게 차근차근 읽어보며 ‘아아──, 이런 일도 있었지.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곱씹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늘그막을 살고 싶다고 어렴풋하게 바라고 있다. 누군가에게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공유할만한 형태로 남겨놓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게 인생 중턱에 있는 나 일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그건 또 다른 후회로 남을 게 분명하다. 남겨 놓으면 그것대로 새로운 후회가 생길 테지만 적어도 미리 알 수 있는 후회는 하지 말아야지.
차분하게 갈무리해서 기록으로 남겨놓은 글에서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과 고민이 전해져 온다. 불과 3년 전일 뿐인데도,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다른 내가 그곳에 있었다. 혈기왕성하고 지금 이 겨울만큼이나 매섭고 차갑던 내 모습이.
글쎄──.
학생이었던 네가 지금의 나를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나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인정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 한심한 주말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