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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Apr 19. 2023

꾸준함에 대하여

2018 겨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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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며칠간 새벽마다 함박눈이 쏟아졌다. 이에 따라 누군가는 아스팔트 거리 위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가며 이미 잔뜩 쌓여버린 눈을 걷어낸 것 같지만, 며칠씩이나 연속으로 이런 날씨가 이어지면 그것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뒤돌아 보면 다시금 새하얀 눈으로 금방 뒤덮여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것처럼, 새하얀 도화지가 다시 펼쳐져 있었으니.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던 눈 내리는 적막한 풍경 한가운데 우산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우산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눈송이의 서걱거림이 어째서 그렇게 야속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설 연휴를 앞두고, 앞으로 이틀 연차를 붙여 일주일을 통째로 쉴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진정한 휴식이라는 느낌이 들어,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에 비운 맥주캔 두 개와 오징어 다리가 몇 개 남아있어, 하나를 집어들어 질겅질겅 씹으며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간단히 방 청소를 하고 나니 점심 쯤이 되어, 서점에서 소설과 에세이를 몇 권인가 사고 근처 카페에서 그대로 한 권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저녁 즈음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방 한 구석에 던져두고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개운한 기분으로 느긋하게 캔맥주를 마셨다. 한 캔을 금방 비우고는,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며 지난 보름 동안 끝없이 이어진 지출 내역에, 가계부 정리가 귀찮아서라도 지출을 좀더 줄여야겠다고 새삼 다짐할 수 있었다.


    밀리지 않고 매일매일 가계부를 정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꾸준함에 대하여──.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부재를 계기로 어제를 내일로 이어주지 못하게 될까봐 강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루정도 건너뛰어도 역시 내일도 문제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 꾸준함은 아직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물론 이런 말로 지금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꾸준하게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건, 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고 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그 끔찍했던 학습지가 생각나는데, 하루에 다섯 장 씩 풀면 된다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일주일 뒤에 서른 장씩 밀려있는 건 일상 다반사였다. 조금 뒤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일기라는 최악의 방학숙제에서 동시에 졸업했을 때 얼마나 희열을 느꼈던가.

   그 대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같은 시험의 비중이 커졌지만 그건 보름 전부터 정신 차리고 준비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그다지 부담스럽진 않았다. 


  지금에서의 이야기지만, 나의 학창 시절은 꾸준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던,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래성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비로소 눈앞까지 왔을 때, 황급히 어떻게든 그럴듯한 모래성을 쌓아 방파제로써의 구색은 갖출 수 있었지만 썰물과 함께 와르르 같이 쓸려 내려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마는 그것. 뻔히 알면서도 반복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 대부분 망각해버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만약 긴 시간을 들여 꾸준히 했다면 좀 더 견고한 방파제로써, 아직 견고히 남아있는 게 있었을까? 글쎼──, 어느 쪽도 확신하긴 어렵겠지만.


  어째서 그 시절에는 꾸준함의 위력을 잘 몰랐던 걸까. 가장 먼저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기엔 너무 어렸고 살아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말 뿐인 꾸준함은 마음 속에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면 조금 달랐을수도 있었겠지. 예를 들면, 만약 어린 시절에 누군가 '하루에 다섯 장씩' 이라는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꾸준하게 노력했을 때와 벼락치기를 했을 때의 점진적인 결과의 차이를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수를 써서든 꾸준함의 필요성을 제대로 납득시켜 주었다면 끔찍했던 기억이 아니라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있었을 텐데.(써놓고 보니 아마 그 시절의 나라면 어느 쪽이든 그냥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뭐──, 결과가 같으니 딱히 상관없나)


  결국 꾸준함이라는 건 가시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결과를 이어 붙여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걸 습관으로써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니 어느정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낸 이후에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짜 매력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뭐──, 일석이조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꾸준하게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면 사소하게 나마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아직 어떤 결과를 봤다고 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어서, 사실 이젠 습관으로 자리잡은 그 일들이 먼 훗날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기대에는 의문점이 많다(지금 이 시점에서 조차도). 그럼에도 지속하는 건, 나름대로 시험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꾸준하게 무언가를 지속하는 일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꾸준하게 뭔가를 계속 습관화시켜나갈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으음──, 꾸준히 먹고 자고 하는 이런 건 빼고…(이것도 중요한 일인 건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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