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 현상 - (인식) - 추상 - 정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순간부터 그 경계를 기점으로 자신과 타자가 확립되지만은 않는다. ‘자아’라는 개념의 인식은 오롯이 자신을 타자로서 취급하면서 비로소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자의식이란 자신의 정신을 떨어져서 관조하면서 정립되는 것이다.
최초의 인식에는 세상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나라는 자아는 세상에 포함되어 있고, 감각을 토대로 그것을 탈락시킬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인식은 단면적이고 일방적이다. 사물과 현상이 빚어지면 그로 말미암아 인식은 상(相, image)를 짓는다. 하지만 상은 사물과 현상에서 취한 것일 뿐, 그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한다. 인식은 타자로서의 세상을 먼저 받아들였을 것이며, 자신과 자아에 대한 것들은 당연시되었을 것이다. 그 일을 가능토록하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가령 카메라의 렌즈는 카메라 스스로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거울과 같은 부수적인 도구가 필요한 일과 같다.
(例) ‘사물, 현상 → 인식 → 상(相)의 성립 → 타자(他者)’ 의 수순을 거친다.
‘하늘 → 카메라의 렌즈 → 카메라의 화소 → 구현된 하늘 이미지’ 와 같다.
인식에서 진정으로 ‘나’라는 개념은 없다. 오롯이 타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설령 ‘나’라고 인식했던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바깥의 기물로서 인식한 ‘나’ 즉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속격(屬格)적인 의미에서 인식될 뿐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나의 상태. 나의 정신. 나의 팔. 나의 다리. 나의 몸통 등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와 인식 추상이 오롯이 ‘외부로서’ 기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내부로서 ‘나’는 인식의 방향과는 반대이다. 추상으로서 언어화가 되었다는 것은 상(相)이 성립했다는 의미이고, 이는 타자로서 정립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속격적인 탈락과정(~의)’는 데카르트가 행한 방법적 회의 이후에 행한 회의이다. 그는 ‘생각한다(인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으로 완결 지었지만 실은 ‘나’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인 만큼 타자로서의 성찰에 한계를 빚은 것이다.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해 고심하면 그것이 종잡을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例) ‘타자(他者)’ → ‘상(相)’ → ‘인식한다.’ → ‘행위자인 나는 존재한다.’(唯我)
‘나(自者)’ → ‘상(相)’ → ‘인식한다.’ → ‘인식한 나는 존재한다.’ …
이는 거울을 맞대놓은 이미지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필자는 이를 매개의 취급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식이라는 행위는 본디 타자인식만을 위해서 구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