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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혼 극복 일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끝났어도 아직도 혼란스러운 나

by 소금빵

이혼과 관련된 행정 조치(?)들이 끝나고, 나에겐 도망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공허함, 소문, 무력감, 내 이혼 사실을 전할 때 상대방의 당황하는 반응, 이런 것들이 남았다.

이제 인생 2막이라며 기억도 추억도 싹 리셋하면 좋을 텐데,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완성하지 못한 글은 늘어진다.


요즘 나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상처를 치료해보자는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내 상황을 내가 인정하지 못했을 무렵엔 내 이별에 대해서 입 떼는게 그렇게 어렵더니, 이젠 레파토리가 생겨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 나와 친했던 동료들은 내가 인사도 없이 제주로 가버린데 의아해했고, 이혼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고,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했지만 그게편과의 문제였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모두가 결혼식장에서 내 남편이 얼마나 행복해했는지를 입을 모아 얘기했다. 낯을 가리고 차가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결혼식에서의 그는 참 행복해 보였다고. 그래서인지 아직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내 전남편이 진짜 죽을병 걸려서 돌아버린건 아닐지 의심과 걱정이 남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한채 나혼자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서른 중반에 큰 일을 겪고, 나는 요즘 내가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몸에서 하얀 털들을 발견했다. 생각도 못해본 부위에서 발견해 몹시 당황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주된 원인이 급성 스트레스라고 한다. 참 별의 별 일도 다있다. 지난 정신적 충격이 이제서야 신체에 나타나나보다.


그리고 나는 좀 많이 외로워졌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있는데, 어울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 든다.


내 인생에서 가족은 공기같은 존재였다. 우린 늘 함께, 인생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같이 누렸다. 내 부모와 동생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과거에도 지금도 내 목숨보다 귀한 내 가족들이다. 나는 그걸 잘 안다.


그런데 이혼을 하고 보니 이 완벽한 가족 속에서 나는 모자란 인간같이 느껴진다.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다 멀쩡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짝꿍 찾기에 실패하고 이혼녀가 되어 제주로 도망을 왔다. 뭐랄까. 똑똑한척하며 잘났다고 멋대로 살다가 크게 데이고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아픈 손가락, 모질이 뭐 그런 존재가 된 느낌. 그래서인지 더 예민해져, 별 의도 없던 말에 해석을 더하며 스스로 손들고 더 상처입고 있다.


내 가족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들이 날 감싸안아주면 나는 죄스럽다. 우리 가족의 행복에 내가 흠집을 낸것 같다. 그래서 난 혼자 있고 싶다.


너무 우울한 얘기들만 늘어놓고싶진 않지만, 이것 또한 다 내 마음인데 억지로 덮으려 외면하려 않고 솔직하게 하나 더 하자면, 나는 이성관계도 두려워졌다.


이십대의 나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라떼는 말이야, 가 아니라, 그때는 나는 사랑받는게 당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에대한 자신감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속에서, 거울 속에서 계속해서 나의 못난 점을 들춰낸다. 내가 늙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예쁘지않아서 내 남편이 나를 질려했던 걸까? 나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게 말도 안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내가 예전만큼 예쁘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꽤 무겁게 담겨 있어서, 어차피 이마당에 내가 나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기에, 요즘은 매일 아침 뛰고, 바르지 않던 화장품을 이것저것 발라보고, 남편과 함께 샀던 옷들을 다 버리고 새로 옷장을 채우고 있다. 카드값 고지서가 날아올 때면 좀 놀라다가도 이정도는 내 자신한테 베풀어도 된다고 다독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 스스로에게서 문제를 찾는 내 행동이 경미한 우울증 증세라는 걸 안다. 근데 뭐 별 수 있나. 작년 하반기에 정신과와 상담센터를 열심히 들락여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병원도 정답은 아니다. 결국 해결할 키는 나에게 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게 쉽지 않고, 여전히 에너지가 없지만, 요즘 나 스스로를 훈련 시키는 것은, 단순하게 살기, 너무 생각 많이 하지말기, 좋은건 좋다고 싫은건 싫다고 말하기. 참지 말기. 나를 최우선으로 두기. 이런 것들이다.


이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나홀로 겪으면서 왜인지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부끄러운 일 한적 없이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삶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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