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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극작가J Sep 27. 2024

퇴사 후 숏폼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엄마한테 인소를 들켰던 초딩은 자라서...


씨X, 민은채 존X 사랑한다고!


모두 어릴 적 흑역사는 있다. 나도 자신 있다. 엄마의 모닝콜로 직접 쓴 인소 대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느 날처럼 학교 가기 싫어 이부자리에서 꿈틀 대던 아침. 생전 욕이라곤 하지 않으시던 우리 엄마 입에서 ”씨X, 민은채 존X 사랑한다고?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 눈도 튀어나올 뻔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광석화처럼 엄마 손에 들린 종이를 뺏었다. 이게 뭐냐는 엄마의 물음에 친구가 썼다고 둘러댔지만,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손글씨 감별사였다. “니 글씬데?” 라며 절대 모른 척 넘어가주지 않으셨다.


20년이 지나 그 딸은, 본인이 직접 쓴, 키스신이 난무하는 숏폼드라마를 엄마 앞에 들이미는 어른으로 자랐다. 사실 부끄러워 보여드리는 걸 고민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긴 한 건지, 집중해서 다 보신 엄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 어머, 재밌다!



라떼는 말이야 연재를 손으로 했어


초등학교 시절, 인소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직접 쓰기에 이르렀다. 두꺼운 수첩에 자필로 빽빽하게. (인소는 인터넷소설의 준말이지만 또래적 허용으로 '인소'로 통칭하기로.) 반 애들 한두 명이 보기 시작한 자필 인소는 입소문을 타고 모르는 옆반에까지 닿았다. 처음으로 연재의 압박을 느낀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친구는 수첩의 빈 페이지를 들고 와서 빨리 다음 화를 써달라고 재촉했다. 이미 자기들끼리 볼 순서를 다 정해놓고서. 그렇게 한 화가 완성되면 다시 돌려가며 읽는, 나름 체계적인 대여 시스템이 구축되어 갔다.


하굣길, 별로 친하지 않던 소위 말해 '노는' 여자애가 운동장에 내 수첩을 들고 앉아있었다. 내 인소를 읽고 있던 것이다. 신기해서 아는 척하려 가까이 다가가보니, 울고 있었다. 남자애들도 호령하던 보이시한 친구였다.

- 야, 너무 슬프잖아.


나만 몰입해서 쓴 게 아니라 모두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너 중학교 때도 그랬어.


숏폼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고 난 이후,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길 들었다.


- 너 중학교 때까지도 그랬어. 우리한테 인소 써서 보여주고, 꿈이 작가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내 기억 속 중학생 시절 장래희망은 줄곧 교사였기에, 믿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다운로드해 열어봤다. 글쓰기 대회 수상기록 네댓 개, 그리고 장래희망란에 떡하니 쓰여있는 '작가'.


외면하고 산 시간이 제법 오래돼서 꿈꾼 적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얘들아, 근데 나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이건 세상에서 나만 아는 비밀인데, 인스티즈에 팬픽도 썼었다. 당시 고3 생활에 활력이 되어주었던 연예인을 상대로.(19금 아님.) 당시 인스티즈는 여주인공 이름을 공란으로 두거나 ‘여주’ 정도로 해서 독자가 본인을 대입하여 읽게 하는 게 유행이었다.


나는 꽤 나르시시스트적인 작가여서, 인소나 팬픽을 쓰는 목적이 상상을 시각화해서 내가 다시 보기 위함이다. 그래서 공부가 힘들 때마다 여주인공에 나를 대입해서 내 작품을 다시 정독하곤 했었다.


그런데 부담스러울 만큼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팬픽 출간 총공이 시작되고 있었다. 스태프들에게 출간에 동의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열아홉의 나는 '지금 이 실력이 활자로 박제되면 나중에 부끄러울 것 같다'라는 생각에 거절해 버렸다. (사실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살던 일이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참 꾸준하게 인소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직장은 돈 버는 곳이야.


그런 나도 취업을 위해서는 전공을 살려야만 했다. (전공은 글쓰기와 관계가 없다.) 상호 간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으니까.


물론 직장 생활 중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재밌는 일을 하는 순간들은 분명 있었다. 그걸 찾기 위해 이직 면접을 서른 번도 넘게 본 나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순간들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재미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사람들은 원래 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직장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곳이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항상 아래 문장을 되뇌었다.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
이게 일인지 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보니 돈이 들어와 있는
그런 일 같지 않은 일.



미쳤나 봐, 나보고 작가님이래!


첫술에 배부르랴 생각하며 써낸 숏폼드라마 대본.

거짓말처럼 덜컥 계약이 되어버렸다.


사실 처음부터 정극에 도전했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 좋게 만난 숏폼 시장은 인소, 팬픽과 매우 흡사했다. 많은 개연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호흡이 매우 짧았으며, ‘오글거리지만 설레는 명대사’ 공식이 통했다.


그날의 얼떨떨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플랫폼 담당자가 했던 말도.


- 기성 작가님이 아니시라고요? 왜 지금까지 직장 생활만 하셨어요?


정신 차려보니 내 대본이 오디션장에서, 대본리딩 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발화되고 있었다.


감정씬에서 한 배우가 대사 중 울컥해 대본에 없던 눈물을 터뜨리고, 그걸 본 상대 배우도 덩달아 울던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작가님, 이때 캐릭터는 어떤 감정이에요?


현장에서 대본에 궁금한 점이 생기면 모두가 나에게 질문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K-직장인으로 살던 나에게 난생처음 들어보는 '작가님'이라는 호칭, 그리고 모두가 내 상상 속 세계를 궁금해하는 일은 퍽 낯선 일이었다.



마침내, 퇴사 후 작가가 되었다.


솔직히 마지막 회사는 워라밸도, 사람도 너무 좋아 그만두긴 아쉬운 곳이었다. 작가로 작품 제작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연차를 썼어도, 심지어 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도, 다 이해해 주고 오히려 진심으로 응원해 주던 사람들.


오히려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다.


회사에 앉아 차기작 각본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고마운 사람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K-직장인 출신 작가라서 유리한 점도 있다. 작품 관련 미팅을 할 때 실무자들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점. 애지중지 내 작품보다는 미팅의 아젠다 정도로 보고 플랫폼의 입장에서 같이 USP를 고민해 주는 편이다. 그래서 처음엔 작가인 줄 모르다가 각본에 쓰인 이름을 보고 작가인 걸 인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요즘 가슴이 뛴다.


4개 차기작을 동시에 쓰고 있는 와중에, 그 작품들 하나하나로 인해 기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엄마한테 인소를 들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초딩은, 엄마한테 키스신 수위가 약하지 않냐고 묻는 으른 작가가 되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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