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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준비하는 세상

by 태현


#표지 그림: 조르조 데 키리코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 1914.


행동을 개시하는 예측들은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면 지금 물어뜯는 일도 없을 것이다. 친구에게 던진 후회막심한 말들은 아예 배운 적이 없다면 지금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뇌는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한다. 마법처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오늘 당신의 뇌는 다르게 예측할 것이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물론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조금 수고를 들이면 앞으로 뇌가 예측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활동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오늘 배우는 모든 것은 내일을 다르게 예측하도록 뇌에 씨를 뿌려 줄 것이다


- 세계적인 뇌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의 책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2021)> p. 118 인용.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뇌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망막에 들어온 빛은 단지 전기 신호일뿐이고, 귀로 듣는 소리 또한 공기의 진동이 전기 신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냄새와 맛, 촉감까지도 모두 신경계를 거쳐 뇌로 올라가면 ‘세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뇌가 조립해 낸 이야기다.


뇌는 자신이 가진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끊임없이 내적 모델을 만들고, 그 모델로 들어오는 각종 신호들을 해석해 낸다. 대부분은 꽤 정확하게 작동하지만,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럴 때 뇌는 억지로 이야기를 지어내어 빈틈을 메운다. 우리가 ‘착각’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바로 그런 경우다.




뇌는 늘 예측한다. 지금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은 실시간으로 외부를 투영한 세계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축적된 경험을 통해 ‘그럴 것이다’라고 가정한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다.


이러한 작용을 가장 급진적으로 상상해 낸 것이 바로 영화 '매트릭스'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들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서 존재하고 있다. 당연히 그 프로그램은 진실이 아니며 단지 전기 신호로 만들어 낸 <가상 세계>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들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뇌 또한 전기 신호를 통해 현실을 재현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고 믿는 <현실 세계> 또한 본질적으로 매트릭스와 같은 구조가 아닐까? 두 세계 모두 전기 신호로 짜여 있고, 인간은 그 신호를 뇌로 해석함으로써만 세계에 닿을 수 있다.


빨간 약을 삼켜 매트릭스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여전히 뇌가 만들어 낸 전기 신호의 세계이다. 우리가 부르는 현실조차 또 다른 층위의 매트릭스일 수도 있다.

모피우스가 내민 빨간 약과 파란 약.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하고 진실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이 아닐지 모른다. 대신에 우리가 묻고 추구해야 할 것은 ‘그 진짜라고 믿는 세계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 짓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을 자각하는 일이 더 근본적인 과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무시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며, 그 선택이 곧 나의 현실이 된다. 세상은 언제나 무한한 신호로 가득하지만, 나의 삶은 내가 선택적으로 주의를 준 몇몇 신호로 구성된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선택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맹시’처럼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의식'의 스포트라이트는 좁고, 나머지는 어둠 속에 묻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느냐는, 결국 내가 어디에 빛을 비추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긍정의 신호를 잡으면 그 세계가 현실이 되고, 불안과 결핍에 집중하면 그 역시 나의 매트릭스가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마음 근력’이다. 어느 책에서 본 표현인데,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이 결국 내 안의 반응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 쓰였다.


마음 근력은 외부 세계를 바꾸는 힘보다 더 근본적인 힘, 즉 내면의 '주의'를 다스리는 힘이다. 그것은 단순한 긍정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과의 깊은 내면소통을 통해 얻어지는 명료함이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의 저자 '리사 배럿'이 말했듯, 오늘의 작은 배움과 시도가 내일의 예측을 바꾼다. 내가 새로운 경험을 선택할 때, 뇌는 그것을 기억 속에 저장하고 다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그린다.


마음 근력이란 바로 이런 반복적인 내면의 훈련이다.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억누르지 않고 바라보는 일, 두려움의 이유를 묻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일.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 〈거리의 수수께끼와 우울>에는 길게 늘어진 낯선 그림자, 정지된 시간, 텅 빈 광장 위를 향해 달려가는 소녀의 모습이 있다. 낮인데도 이상하게 불안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무엇인가 곧 일어날 것만 같다.


조르조 데 키리코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 1914.


이 기묘한 공간은 마치 우리의 의식 속 한 장면처럼 현실과 가상이 겹쳐 있다. 뇌가 만들어 낸 예측의 세계가 어쩌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선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빨간 약을 삼키는 극적인 결단이 아니라, 매 순간 내 마음을 바라보고 다스리는 작고 꾸준한 선택에서 비롯된다.


그 매트릭스의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주파수로 세상을 맞추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진심으로 받아들인 신념, 내면 깊이 각인된 의식의 방향은 결국 현실을 바꾸는 뇌의 신경망을 다시 짠다.


결국 현실이란 뇌가 만들어 낸 서사이지만, 그 서사를 어떻게 살아낼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것이 내가 매트릭스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다.


네오와 트리니티가 모피우스를 구하러 기적에 도전한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지를 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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