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표지 그림: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 1942.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작사, 작곡. <낭만에 대하여> 중에서 -
가요 <낭만에 대하여>는 '영일만 친구',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이름을 알렸던 가수 최백호가 1994년에 작사, 작곡한 그의 인생 노래이다. 벌써 30여 년이 흐른 곡임에도 수많은 후배들이 즐겨 부르고 지금도 여전히 그를 무대로 불러내는 매력 만점의 친구이다.
조용히 울리는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면, 어느새 마음은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해진다. 그러다 이내 등장하는 통속적인 아코디언 소리는 낡은 필름처럼 아련한 과거를 불러내며, 듣는 이를 시간의 터널 속으로 이끈다.
그것은 마치 먼지 낀 골목 어귀의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듯, 한 시대의 낭만과 쓸쓸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 짧은 전주만으로도 노래는 이미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특히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하는 대목을 들을 때는, 화려하거나 거창한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 자체가 그냥 낭만이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아서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쓸쓸함이 물씬 풍기는 거친 음색과 부드러운 완급조절로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감성을 담아낸다. 최백호만의 독보적 음악 세계와 철학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의 찐 노래이다.
어제는 '근로자의 날'이라 오랜만에 침대에서 일찍 나오지 않고 늦게까지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휴일의 여유로움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창문을 두드리는 잔잔한 빗소리였다. 이따금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회색빛 아침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 날씨 속에서 마음은 자연스레 가라앉았고,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은근히 스며들었다. 바쁜 일상 때문에 깊숙이 묻혀 있던 감성과 회한, 그리고 이름 모를 낭만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날 아침의 비, 잿빛 하늘, 그리고 그 노래는 하나의 감정으로 겹쳐졌다.
먼지가 내려앉은 골목을 지나가듯, 나는 종종 오래전 나를 떠올린다. 젊은 날 나는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을 것처럼 웃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용기로 사랑했다. 때로는 다투었고, 때로는 뜻 모를 이유로 울기도 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빛났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빛이 언젠가는 손에 닿지 않는 것이 된다는 걸.
길을 걷다 오래된 벽화를 발견하면 나는 걸음을 멈춘다. 색이 바래고, 금이 가고, 몇몇 조각은 떨어져 나간 벽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낡은 그림 속에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낭만이란 어쩌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그래서 생각한다. 낭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모양을 바꾸어 남는 것이라고.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수는 없지만, 문득 돌아보는 골목 어귀처럼 조용히 마음 한편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회사에서의 하루는 대부분 정해진 틀 안에서 흘러간다. 아침에 출근하면 쌓여 있는 메일을 확인하고, 다가오는 기한에 맞춰 자료를 정리한다. 회의 중에는 다들 중요한 안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전략을 세운다.
그러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순간순간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건 무엇일까.
퇴근 시간이 되면, 문득 잊고 지냈던 소중한 무언가가 떠오른다. 오래도록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을 어느 날 불쑥 꺼내 보이기도 한다. 바쁜 하루의 끝,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모퉁이 작은 꽃집에서 피어 있는 들꽃처럼.
나는 오래전 이름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에서 불러본다. 오래전에 스쳐간 풍경들, 서툴지만 진심이었던 꿈들, 끝내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 모두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살아간다는 건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해 가슴에 쌓아두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애틋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지나간 오늘의 시간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낡은 골목처럼 조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