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모두 다 꽃이야>
#표지 그림: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세느강>. 1873.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류형선’ 작사, 작곡. <모두 다 꽃이야> 중에서
내가 이 동요를 처음 들은 것은 우리 딸애가 다니던 어린이집 졸업식에서였다. 졸업식은 전체 원생들의 학예회와 겸해서 하는 조촐한 잔치였다. 어린이집 강당에는 작고 앙증맞은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부모들과 교사들, 아이들이 뒤섞여 따뜻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식이 끝나갈 무렵, 아이들이 무대 앞에 동그랗게 둘러섰다. 반주가 흐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모두 다 꽃이야>였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곧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합창으로 번졌다.
가사는 너무도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어디에 피었든, 어떻게 생겼든, 이름 없이 피었든, 모두 다 꽃이라는 말. 그것이 유난히 울컥하게 다가왔다.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은 제각각이었다. 수줍은 아이, 씩씩한 아이, 졸음에 겨운 아이까지.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정말 모두가 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문득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답을 요구하고,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추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라는 말은 어쩌면 그때 나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회사일은 늘 벅차고,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 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전보다 더 눈치도 봐야 하고, 실수 한 번에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집에서도 녹록지 않다. 아내 역시 바쁜 직장생활로 지쳐 있고 딸애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 어느새 사춘기의 문턱을 넘었다. 예전처럼 다정하게 안겨오지도 않고, 말끝마다 “몰라”, “그냥”이 돌아오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퇴근길에 우연히 들은 이 동요가 내게 그날의 감성을 떠오르게 하면서 조용히 말을 건넨다.
“모두 다 꽃이야.”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때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보이지 않는 불화, 가족과 어긋나는 대화 속의 거리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나대로 꽤 잘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나라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와 비교하며 흔들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관계’라는 단어를 자주 고민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특히 가족이라 해서 무조건 모든 걸 공유하고, 붙어 있어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고,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도록 보조를 맞춰주는 일, 그게 어쩌면 더 깊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내도, 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날 들은 그 한 줄의 노래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색과 향을 지닌 꽃이다. 누군가는 화려한 장미처럼, 누군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살아간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꽃이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구별 어디에서 살아가든 모두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꽃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꽃은 누구와 비교도 질투도 하지 않는다. 오직 제 자리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칠 뿐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스스로 자존감을 기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건강한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은 가족, 친구, 동료 등 인생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감과 존엄성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오롯이 나만의 삶을 살아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