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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그린 내 빈 곳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by 태현


#표지 그림: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7.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로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 유재하 작사, 작곡,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사 중에서


가수 '유재하'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사랑하기 떼문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유재하(1962~1987)가 1987년에 발표한 데뷔작이자 유작인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수록된 곡이다.


그는 25세의 짧은 생애 동안 단 1개의 앨범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2018년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이 앨범을 1위로 선정하며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단일 작품”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날 들어도 훌륭한 세련미와 단아함을 지녔으며, 어눌하지만 정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세션, 간결하고 담백한 노랫말, 사색적 분위기 등이 고루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의 어린 가수들에게도 커버곡으로 인기이다.


악뮤 이수현
김필
서인국




대중적으로는 그의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가 더 널리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에 더 깊이 끌린다. 가사의 표현 하나하나가 마치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지은 것처럼 애절하게 다가온다.


그림으로 치면 '자화상' 같은 느낌이다. 스스로 잘 알면서도 어쩌지 못해 좌절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내면을 그리는 화가들의 심정을, 이 노래를 들으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마음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감히 손을 뻗지 못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책하면서 한 발 물러서는 감정.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날들이 쌓여 간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런 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만 같아 조용히 숨죽이게 된다. 슬프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데 묘하게 아픈 건, 어쩌면 나 자신에게조차 솔직해지지 못한 그 안타까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재하의 유일한 방송 출연 영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너무 빠르고 시끄럽다. 뉴스는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사람들의 말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세상은 우리에게 미처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다음’을 요구한다. 한 발 더 먼저 내디뎌야 한다고.


또한 이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행복'하라고 요구한다. 행복해야 하고 행복해 보여야 하며 행복을 향해 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하듯 “그래, 나 행복해져야지”라며 뭔가를 찾아 나선다. 돈을 벌고, 여행을 가고, 관계를 맺고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찾고 있는 행복은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일까?"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이유. 불쑥 찾아오는 고독,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 그 감정은 어디서, 왜 오는 것일까?

Zurine Aguirre. Illustrator & Designer, Spain




세상은 이 고독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고독은 곧 실패처럼 여겨지고, 혼자는 ‘문제 있는’ 사람처럼 비친다. SNS에서 친구가 없거나, 주말에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여행을 간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찾는다. 사실은 내 안이 공허해서,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갈망해서, ‘사랑’이나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기대려 한다.


그 기대는 종종 실망으로 돌아온다. 타인은 결코 내 빈자리를 완벽히 채워줄 수 없다. 아무리 가족과 친구, 연인이 곁에 있어도 자기 내면의 고통과 질문은 결국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 누구도 대신 아파할 수도, 대신 슬퍼할 수도 없다.


고독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그걸 받아들이기 전에는 늘 불안하고,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며, 그런 관계에서 지치게 된다. 고독은 단순히 혼자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상태, 세상과 분리되어 있지만, 나 자신과 같이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다.

Erika Yamashiro (에리카 야마시로). Illustrator, Japan


고독이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면, 고통은 그 존재가 세상과 부딪히며 맞닥뜨리는 실질적인 현실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원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존재다. 욕망이 충족되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바로 다음 욕망이 고개를 든다. 그 끝없는 추구 속에서 우리는 성마른 결핍을 느낀다.


그 결과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행복하려 하면 할수록 행복해질 수 없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다. 충족되면 공허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이 모순된 구조.


이 통찰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정확히 보는 데서 고통의 정체를 분명히 할 수 있다. 지금 나도 어쩌면 그런 고독의 순간을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 혼자인 시간, 외로운 마음, 말할 수 없는 생각들.


Achiki (아치키). Illustrator, Japan


그렇다면 이 끝없는 결핍, 이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워진 마음 한 켠을 억지로 무언가로 채우기보다는, 그 빈자리가 나라는 사람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 거기서부터 비로소 진짜 위로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내가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는 그 조용한 순간을 위해.


Edward Hopper - Office in a Small City,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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