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나는 공단이 키웠다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나는. 배울만큼 배웠다. 웬만한 회사 들어가는데 문제 없을 만큼. 자소서를 쓰라고 하면 아빠가 빠져도 가족란은 일곱 줄이 필요하다. 학력란은 다섯 줄이나 채울 수 있다. 여기에 주유소에서 일한 경력, 고기집에서 일한 경력, 산후조리한 경력까지 더하면 자소서 두 장은 너끈히 채우고도 남는다. 그 모든 것이 공단 덕분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큰 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네 살에 공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고작 열네 살에. 친구들과 떡볶이 먹을까, 라볶이 먹을까 고민할 나이에. 문제집 산다고 거짓말하고 받아 낸 돈으로 영화 보러 갈 나이에. 일곱 명이나 되는 가족의 밥을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삼교대로 일한다는 건 어떤 걸까? 고작 열네 살 큰 언니는 한 주는 낮 2시에 출근하고, 다음 주는 아침 7시에 출근하고, 그 다음 주는 밤 11시에 출근한 후 3주 만에 한번 쉬면서 살았다. 그렇게 일해서 받은 월급 중에 반을 떼어 일곱 명이 사는 집으로 보냈다. 내가 먹은 동태 찌개가, 고등어 구이가 공단으로부터 왔다. 똑같이 생긴 기계가 몇 십대 늘어진 공장 안에서 한 달이면 해운대까지 펼치고도 남을 옷감을 만들어 내면서 바다는 커녕 집에 한 번 오지 못했다.
큰 언니 눈에 수술도 하지 않은 상커풀이 생길 무렵 열일곱 살 된 쌍둥이 언니들도 공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큰 언니보다는 삼년 늦은 것이라지만 그래도 고작 열일곱 살이다. 삼년이라는 세월은 큰 언니와는 다른 삶을 주기는 했다. 쌍둥이 언니들은 야간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5시까지 일하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학교에 앉아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낮에 공부하고 야간 자율학습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들겠지.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에도 내려오는 눈꺼풀에 못 이겨 꿀밤을 맞아 속이 상했겠지. 독서실과 도서관은 커녕 일하는 틈틈이 단어장 외우고 시험 준비를 했겠지. 언니 둘이 못 잔 잠만큼 생활비는 넉넉해졌다. 이제 가끔 돼지고기 반찬도 시골 집 밥상에 올라왔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도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로 이사도 나왔다.
오빠는 아들로 태어난데다 첫째라는 이유로 중학교까지는 갔다. 큰 언니보다 두 살 오빠지만 공단은 큰 언니보다 한 해 후배였다. 덕분에 언니와 함께 공단 생활을 시작했다. 예쁜 여동생 덕분에 친구들이나 상사들이 잘 해주었지만 섬유 회사에 오빠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빠는 전자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한 달 월급이 백 만원도 안 되는 시간을 견디며 한 주는 아침에, 한 주는 야간에 일하는 교대 근무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를 중학교에 보내고, 고등학교가지 보냈다. 그리고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내주었다. 동생 학교 보내느라 30대의 연애를 포기한 오빠는 10년을 애쓰고 내 대학 졸업식날 학사모를 썼다. 자기보다 커버린 동생 옆에서 활짝 웃으면서 사진도 찍었다. 사진 속 오빠는 활짝 웃고 있지만 난 차마 그 사진을 보고 웃을 수 없다.
나는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내 입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말이다. 없어져야 할 낱말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아니 나에게 공단에서 일한 근로자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공부해야 할 시기에 일하면서 우리나라를 키워낸 사람들이다. 거기에서 나온 모든 것들로 가족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자랐지 않은가.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어려운 일을 땀흘리며 해낸 사람들이다. 눈물로 보낸 시간들을 켜켜이 풀어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건축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슴에 품고, 배움에 목말라 오십이 넘어 대학 동창까지 만들고야 만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낮춰서 불려 질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공단에서 일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며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