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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24. 2024

내가 살던 고향은, 없어졌다.

농촌은 도시가 커지는 만큼 피폐해졌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을 내부 식민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농촌은 젊은이와 식량을 도시로 보냈고, 도시는 농촌으로 혐오 시설과 쓰레기를 보냈다.

석탄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 화학공장 등 각종 기피 시설이 지방으로 왔다.

- <돼지를 키우는 채식주의자> 中 프롤로그


경상남도 김해. 정확히 내 고향은 아니다.  엄마 아빠, 9명의 큰아빠 작은아빠 고모와 4명의 큰이모 작은이모 외삼촌의 고향이다. 그리고 내 할머니, 나의 외할아버지는 평생 그곳에 사셨고, 그곳에 잠들어 계신다. 코끝이 어쩐지 시큰해 진다.  내게 관심이 없던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빼놓아서 그런가? 그렇다면 인심써서 그분들까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실제 고향은 부산이지만 김해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부산과 김해는 아주 가깝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내 친척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유학 가기도 했다. 정년 후 부산에서 김해로 내려간 친구 부모님은 거기서 토종 삽살개 벼루와 함께 살고 계신다. 친구는 거기서 산후조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해는 내게 더 이상 김해가 아니다.


이상한 낌새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산소 방문을 위해 시골 동네에 들어선 그날 익숙한 소똥냄새는 여전한데 배경이 바뀐 걸 대번에 알았다. 어쩜 색깔도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회색인지. 커다란 원통형 굴뚝이 있는 공장이 떡 하니 눈에 띄었다.


차창을 내리고 낯선 공장을 보다 '아, 뷔기 싫게 공장이 들어왔네' 정도 생각했다. 그 공장이 앞으로 몇 년 간 얼마나 들어설지도, 그게 시작이었다는 것도 전혀 짐작도 못했다.


어느 순간 소똥 냄새는 사라졌고, 산소에 올라 내려다보는 시골 풍경은 달라졌다. 초록, 황금 물결의 일렁임은 자취를 감췄고 거대한 굴뚝이 움직이지 않는 고목처럼 뿌리를 박고 연기만 뭉게뭉게 피워댔다.


그러다 내내 팔리지 않던 외할아버지의 땅이 팔렸단 소식이 전해졌다. 땅이 제법 큰데 쪼개서 팔면 손해라고 해서 덩어리로 내놓아 몇 년째 팔리지 않던 땅이었다. 가격을 조금 내렸는데 그래도 팔리지 않던 땅었다.


팔린 직후 땅값이 올랐단 이야기가 들렸다. 아빠는 아빠 땅도 아닌데 속았다고 배 아파했다. 나는 대규모 공장이 또 들어선 것이란 생각이 들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싼 값에 공장자릴 내준 일을 떠올리면 차라리 사촌에게 땅을 사주고 싶을 정도로 속이 불편하다. 땅을 판게 아니라 마음자릴 싸게 도려낸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전. 아빠가 "할아버지 산소를 옮기라고 공고가 붙었더라"고 담담한 채 소석을 전해줬다. 산소 자리에 큰 도로 계획이 잡혔다고 한다.  엄마는 "외할아버지 산소는 그런 얘기 아직 없어"라고 말했지만 평안이 오래 가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내 조부모, 외조부가 국가 산업화에 쫒겨  오래 머문 자릴 내줘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내가 여타 영화 등을 보며 짐작했던 것보다, 아니 비교할 수없이 거북한 일이었다.


거대 산업이 거침없이 시골 읍내까지 먹어치운 것을 알고서 뜨악했던 마음이, 내 조부모의 산소마저 뺏어가련기에 깊은 무력감에 빠진 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김해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 발걸음 할 일이 없겠다는 지리적 거리 그 이상의 의미였다. 평소엔 신경 쓰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자꾸만 시골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언덕처럼 작은 산 위에서 서성였다.


과도 하나만 챙겨가면 아무 가지에 손을 뻗어 먹을 수 있던 감나무 과수원, 매년 제삿상에 오르던 주황색 딱딱한 단감. 뉘집 개인지 모를 동네 똥개. 천장이 유난히 낮았던 회색 시멘트벽의 동네 전빵, 큰 집 가는 길 있던 오래된 우물,  사돈이 마주 묻힌 야트막한 산 둘, 이젠 안녕. 정말 안녕이다. 나는 가지도 못하고 이별을 고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한 일, 속상한 일이다.


고향이 없어졌단 거, 알던 사람이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 그 서운함을 채운 게 고작 공장이라니.


시골 정경을 대신한 공장이 우리의 편의성이란 이름으로 들어섰다.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공장이 내뿜을 매연, 폐기물은 또 무엇을 해칠까. 내가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이 그 뒤에 첩첩이 있을 게 분명하고 나는 또 뒤늦게 알겠지.


우릴 위한 무엇을 생산하기 위해 희생될 많은 것들이 괜히 떠오른다. 어쩌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무력감 따윈 느끼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생각하지 싫은데 심란한 틈을 타 괜히 설렁설렁 들어와 마음에 깊이 파고든다.


모든 게 돌고 돌아 내게 올텐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어쩌지 못하고, 어느 터전을 앗아 세워진 공장에서 생산되었을 노트북과 마우스를 들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다 커피를 마신다. 휴지로 안경 속 눈물을 찍어낸다. 빚을 지고, 지고 또 지고 사는 것처럼 모든 행위가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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