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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17. 2024

등은 늙었지만

<눈물의 여왕> 마지막회를 보는데 남주와 여주가 말이 통한다. 


현실 남녀라면 오해할 법도 한데, 둘 다 고상하게 은근히 돌려 말하면서도 천천히 서로가 묻는 것, 답하는 것을 정확히 잘 알아듣고, 차근차근 웃으며 '정답'을 얘기한다. 


심지어 한때 서로를 할퀴었던 예민한 기억관해 이야기하는데 주거니 받거니 핑퐁처럼 대화가 된다. 


TV 50cm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바짝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넋 놓고 보다가 한마디 힌다. 


- 저러니까 드라마지. 현실은 저럴 수가 없어. 

- 왜? 

- 둘이 대화가 되잖아. 저게 실제라면 한쪽이 말귀를 못 알아먹고 딴소리를 해야 해. 

- 아빠처럼? 

- 뭐, 아빠도 그렇고. 무튼 그래서 다른 한쪽이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하고 끝나야 그게 진짜지.  

- 엄마처럼? 

- ............ (뭐지? 이 상황.. 좀 곤란한데?) 엄마랑 아빠정도면 말이 그래도 잘 통하는 편이야. 니가 여친이 생기면 알거야. 남자랑 여자랑 말이 얼마나 안 통하는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남편이랑 말이 그렇게 잘 통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들의 반에도 한부모 가정이 늘었고, 섬세한 아들이 불안할까봐 T모드에서 엄마모드로 바뀐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와 사는, 얘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는 있다. 


어느 날은 등이 아파 온열매트를 키고 누워있었다. 


우리집 손석구가 옆에 앉더니 "넌 아직 풋내기처럼 풋풋하다. 얼굴도 어려보이고 흰머리도 없고 주름도 없네"라고 머리카락을 만진다. 


"난 등이 늙었잖아. 남들보다. 이제 곧 엉덩이가 쳐질거야. 엉덩이를 끌어당기는건 등근육이거든. 얼굴이 두피근육에서부터 당겨져야 얼굴이 팽팽한 거랑 마찬가지지"라고 입맛 떨어지는 소릴 했다.


그래도 내심 '오올, 제법 예쁜 소릴하네' 싶었다. 


제 눈에 안경,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우리가 꼭 그렇다. 


보청기를 맞춰줘야 하는지 바로 옆에서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설사 들어도 딴소리하지만 주말 신문에 김동식 작가의 짧은 소설이 나오면 스크랩해서 책상 위에 올려다 놓아주는 사람.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면 하루종일 뭘 하고 돌아 다니길래 핀잔 대신 "무리해서 그래, 조정래 작가도 탈장이 왔다잖아."라고 노화에 조정래 작가님을 감히 들먹여 주는 사람. 


폐렴에 걸려 열흘간 아무것도 못 먹고 오로지 복숭아만 먹을 때 퇴근길에 "복숭아 주세요"라고 조용히 사오면 될 것을 "딱딱한 복숭아 있어요? 우리 부인이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해서요. 꼭 달고 딱딱한 복숭아를 주세요."라고 말해서 난데없는 노산설을 동네에 흘리고 다니는 사람. 


어느새 혼자 늙어서 희끗해진 머리카락이 제법 귀여운 사람. 


몸매 관리를 하겠다고 밥은 굶으면서 점심을 당 덩어리 샤인머스캣 한송이로 때우는 사람.  


팔자 걸음을 못 고쳐 설거지 할 때는 조신하게 모은 다리와 양발이 꼭 인어꼬리 같은 사람.


같은 술톤이라 영화배우 황정민만큼은 삐끼삐끼를 출거라 생각했는데, 반의 반도 못 따라가는 짠한 사람.   


저렇게 부족하고 부실한데 처자식 부양하려고 아침마다 잘 일어나서 회사 가는 걸 보면 꽤 기특한 사람. 


실제로 그렇든 말든 내 눈에는 그저 동네 아줌마들 맘이 싱숭생숭 하겠다, 싶을만큼 잘 생긴 사람. 


누가 뭐래도 내겐 그런 사람 없다. 


사람 사정은 다 비슷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남들이 욕하면 지가 뭔데, 화가 나고 지금껏 같이 사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짚신에 짚신을 신으면 당연히 짝이 맞지만 구두에 부츠, 크록스에 스니커즈를 콜라보 해도 의외로 짝이 맞다 싶은 영혼의 패피 커플도 있다.  


등이 늙어도 최선을 다해 결과를 보여주고픈, 뭐든 다 해주고 싶은 예쁜 사람이 오래 내 곁에 있다. 


하늘이 정해준 소중한 내 짝을 많이 아껴주고 싶다. 


이제 잔소리 그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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