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땡기는 한낮

위스키가 먹고 싶어서

by 윰윰
갑자기 위스키가 땡기는 오후다.


점심을 먹었고 할 일은 쌓여 있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올듯 말듯 우중충한 날이면 나는 위스키를 먹고 싶다. 안주는 중요하지 않다. 하몽에 메론을 곁들여도 좋고, 브리치즈나 까망베르 치즈를 살짝 데워서 견과류와 곁들여도 좋고, 연어나 광어 같은 저렴한 회여도 좋고, 개불이나 멍게, 해삼, 고노와다 같은 해산물도 좋다.


또는, 갑오징어 회에 연어알이나 날치알을 살짝 곁들여도 괜찮고, 트러플 오일이 들어간 리조또나 파스타여도 좋겠다. 전복 내장으로 만든 게우소스를 곁들인 파스타라면 더 입맛이 돌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올리브 몇 알 정도여도 충분하다. 어떠한 안주든 간단히 배를 채우고 속을 비지 않게만 하면 된다. 메인은 어디까지나 위스키다.


위스키를 잘 모른다. 몇 권의 책을 보았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은 있지만 그뿐이다. 공부하려면 또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위스키라는 주종일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취향만을 안다.


나는 특히 아일라섬에서 증류한 피트 위스키들을 좋아한다. 다른 증류소는 잘 모르기도 하지만, 아일라섬에서 증류한 것들에는 바다 짠내와 해산물 내음이 깃들어 있어서 좋다. 탈리스커, 라프로익, 라가불린 같은 것들이다. 목넘김이 약간의 알싸하고 전체적으로 묵직한 느낌으로 내려가는 걸 좋아하는데 코끝을 스치는 피트향 만은 제대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맛이 라이트해서는 안 된다. 끝맛에 해산물, 바다 내음과 같은 짠내가 감돌면 완벽하겠다.


최근에는 쿨일라를 먹어봤는데 첫맛은 완벽했다. 적당한 피트향, 묵직한 목넘김 하지만 그 이후는 너무도 가벼웠다. 뒷맛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 전에 먹은 아드벡은 첫맛부터 내게는 라이트했다. 이런 식으로 내게 맞는 위스키들을 찾아가는 것뿐이다. 또, 아드벡은 바텐더 말에 따르면 아드벡 10년과 다른 라인의 맛이 달라서 또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추후에는 다른 라인업을 찾아봐도 좋겠지만, 결국 돌고 돌아 탈리스커로 되돌아올 것 같기도 하다.


어제는 라쇼몽의 '지옥변'이라는 소설을 봤다.


이 작가의 문체는, 정확히는 문체의 호흡은 내 취향이다. 스토리는 살짝 아쉽지만(결말부에 한 톨의 희망조차도 남기지 않는 느낌이라) 문장은 곱씹어 볼 만하다. 나는 설명조이거나, 너무 친절한 묘사의 문장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점프했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다시 앞 문장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유형의 문장을 좋아한다. 적당히 밝히고, 적당히 숨기는 것들... 하지만 종국에는 한숨처럼 무언가를 내뱉는 종류의 것들 말이다.


돈벌이를 위해서 쓰는 문장들은 많은 것을 밝히되 후킹해야 한다. 후킹하고, 집중을 요하는 것들을 익히는 게 내 글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한다. 어쨋거나 사람들이, 더 많은 대중들이 내 글을 읽을 수록 돈벌이로부터 해방되어 글만 써도 되는 길이 열릴 테니까... 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충동적으로 본 타로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대중성을 겨냥해서 써보려 했던 글에 대해 질문했을 때 기묘하게도 시작조차 못할 거 같다고 했고, 한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단기적으로 돈은 되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미지수라는 말이었다. 그 다음, 내가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써지나 돈벌이 탓에 잠시 버리려고 했던 글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돈벌이에 대해서도 초반에는 잘 모르겠으나, 다음에는 잘 풀릴 수 있고, 뭣보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결국엔 <라쇼몽> 같은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닐까 하고. <라쇼몽>으로 묶여 있는 그 책 안에 담긴 단편, 중편 같은 글들을 쓰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글들에는 모럴, 윤리의식 같은 것이 거의 부재하다. 회색 지대에 작가는 서 있다. 거기서 그저 들려주고 보여줄 뿐이다. 사람들의 욕망을, 실수를, 결단을, 그리고 '습' 같은 것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보여줄 뿐, 평가하지 않는다. 평가를 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다만, 나는 그 뒤에 '딱 빛 한 줄기' 정도 넣고 싶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로서는)


그러니, 열어두자는 것.


아무렇게든 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과 좀 더 읽힐 만한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과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번아웃이 뒤섞여 주말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어쩌면 그래서 '술', 한 두잔이 땡기는 걸수도 모르겠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생각은 자유해진다. '해야만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얽매여 있던 의식이 그 틈을 타고 나와서 숨을 쉰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는 한숨이다. 솔직히 말하면 무얼 써야할지 모르겠다. 흐릿한 단상만이 맴돌 따름이다. 가끔은 아주 지독하게도 잔혹한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고, 어느 순간에는 가슴 설레는 달달함이 땡기고, 하지만 결말은 언제나 쓰다. 쌉싸름한 끝맛 속에 기어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짠맛처럼 꼭 피트 위스키처럼, 눈물나는 새 시작을 담아주고 싶은 거다.


완전한 자유는 없다.


삶이란 건 일종의 속박과도 같다. 내 양 발목에는 족쇄가 걸려 있다. 그것은 중력이다. 이 땅에 발 붙이게 하는 족쇄이고, 인체라는 '틀'이다. 이 몸 속에서 숨을 쉬며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해야하는 것'들에 둘러싸인다.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그러한 족쇄를 모조리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이지 한 번 사는 인생을 맘가는대로, 모럴이란 건 한 모금도 들이키지 않고 태어난 것처럼 살아가며 타인, 타존재에 위해를 끼침으로써 존재하는 존재도 있다. 그런 인생도 인생이다.


다만, 그렇지 않을 때 고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고뇌를 달래는 것은, 단 한 잔의 술이다.


혀끝에 감돌다가 이내 목구멍으로 타고 내려가는 방울, 방울들을 생각한다. 이런 날이면 그저 아늑한 조도의 빛이 깃드는 조명 아래 나른하게 앉아 쉬고 싶다. 책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에서 고개를 외로 틀며 한없이 삐딱해지고 싶다. 책을 읽었다가는 도로 덮고, 글을 끼적였다가는 마구 찢고, 그림을 그려보다가도 멈추고 싶다. 미완의 상태로 머무르고 싶다. 완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완성'으로 가는 길을 끝없이 유예 중인 건지도 모른다. 이런 찝찝함을 아는 사람들이 있겠지. 꼭,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겠지. 결국 내가 글을 쓰려고 했던 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초심을 기억하자.


내가 내 취향의 글을 읽고, 아무렇게나 끄적이며, 다다다닥 울려대는 타자 소리에서 비로소 숨을 쉬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러한 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러한 글을 이미 찾아냈고, 또 다른 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반짝하고 드는 순간이 있다면, 그리하여 단 한 명의 마음에라도 깃들게 된다면, 그렇게 그 '단 한 명'을 여럿 갖게 된다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그마하게 기대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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