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영화의 시작, 13명의 배우들은 연출가 앙투완 당탁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전화를 받는 그들의 모습이 한 명 한 명씩 연이어 보인다. 그 혹은 그녀에게만 비친 조명은 연극의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같아서 그들이 배우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게 전화를 받은 이들은 앙투완의 유언을 듣고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다. 페일롱에 있는 그의 저택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집이다. 친구들은 그의 집이 그와 닮았다고 말한다. 넓고 탁 트인 저택 내부는 마치 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든 요소들에 연극의 특징이 녹아있다.
친구들이 모두 모이고 이후 인물들의 행동을 해설해주는 텍스트가 등장한다. 해설은 마치 무성영화의 그것 같기도 하고 연극 대본의 한 부분 같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 텍스트의 화자는 감독인가, 앙투완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러한 의문들이 점점 쌓인다. 이것이 애초에 감독이 의도했던 의문인 것은 아닐까. 현실과 극의 경계,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는 증폭되고 중첩되면서 풍부해져 간다.
앙투완의 유언과 함께 젊은 극단의 연극 에우리디스가 시작된다. 연극의 내용은 유명한 오르페우스 신화를 따른다. 다만 현대적인 각색과 더불어 주인공이 오르페우스에서 에우리디스로 바뀐다. 1막에서는 사랑에 빠지는 두 남녀, 2막에서는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 3막은 명계로 에우리디스를 찾아가지만 결국 실패하는 오르페우스, 마지막 4막에서는 에우리디스와 함께 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오르페우스를 보여준다. 두 남녀는 이틀 동안 사랑을 나누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모든 과정들을 거쳐간다.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그럼에도 또다시 서로를 찾는다.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수백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감에도 인간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에우리디스가 보여지는 방식은 특별하다. 감독이 영화적 장점과 연극적 장점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라 추측해본다. 평생 영화를 만들어온 노장 감독으로서 영화의 한계를 부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분명 장점이 많은 예술 분야이지만 그 생명력과 에너지에서는 연극을 따라가기 힘들다. 연극이 생명력을 갖는 지점은 한 번의 연극과 온전히 똑같은 연극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때문에 다양한 배우,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모습으로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똑같은 하나의 형태만을 볼뿐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그 한계를 부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젊은 극단의 연기가 시작되고 오래된 배우들은 그저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 자신의 대사들을 같이 읊조린다. 1세대의 에우리디스, 2세대의 에우리디스, 3세대의 에우리디스. 연극은 3명의 에우리디스와 3명의 오르페우스를 보여준다. 3세대의 이들은 스크린 속에서, 1세대와 2세대의 이들은 저택과 무대, 기차역과 마르세유 호텔방을 오고 가면서 연기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한 세대만, 어느 부분에서는 두 세대가 같은 부분을 두 번 보여준다. 하지만 그 대사나 움직임은 온전히 똑같지 않다. 에우리디스 안에 있는 소녀스러움, 분열, 충동, 욕망, 공포를 모두 표현하지만 각자의 에우리디스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다르다. 이러한 장치들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영화는 자연스레 그들의 연기를 보조해준다. 대사를 읊는 그들에게 조명을 비추고 실제 공간을 내어주기도 한다. 기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 우리는 이게 연극인지 영화인지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앙투완의 저택은 이렇게 거대한 무대로서 기능한다. 어디까지가 저택인지, 현실인지, 관객이 그것을 알 필요는 없다. 인물의 감정선과 이야기의 흐름만 바르게 흘러간다면, 배우가 변해도 공간이 변해도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구성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들의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은 오직 한 쌍의 남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모두의 고민이다. 세상 모든 사랑하는 이들은 누구나 겪는 과정들이다. 극과 현실이 무너진 지점에서 관객, 당신 또한 그 속에 녹아들 수 있다는 것. 감독은 그 여지를, 작은 공간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수 천년 전의 인간들에게서부터 현대의 인간들에게까지 전해져 온 흔한 사랑 이야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반복되고 전달되어가는 역사 속에 우리가 있다. "어려워.” 에우리디스의 잠꼬대처럼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 사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는 지점일까. 나뿐 아니라 나 이전에 살았던 그 모두에게 삶이란 것, 사랑이라는 것은 어렵고 어렵다는 사실이.
영화는 끝까지 현실과의 모호한 경계를 띤다. 죽은 줄 알았던 앙투완은 명계에서 돌아온다. 그와 친구들은 다시 만남을 기뻐하지만, 영화는 마냥 밝게 끝나지 않는다. 처음 집사가 말했던 25살 어린 여자의 떠남이 아마도 앙투완의 마지막 봄이었을 것이다. 앙투완은 물에 뛰어든다.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의 곁에 있었다. 결국. 많은 어리석고 현명한 인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