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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May 13. 2023

비어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방법론(3)

: 시지각에서 비어있는 것(들)을 보기위한 방법론


3. 지각에서 비어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방법론


 과학에서 비어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방법론 말미에 “저는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거나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나타나는’ 현상 속에 이러한 ‘세계 너머의 세계’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선 논의에서 저에게 ‘비어있는 것(들)’ 이라는 단어 혹은 ‘세계’라는 단어가 제게 의미를 가지는 지 설명되었기를 바랍니다…) 이 주장이 근거를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감각과 지각에 대하여 탐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여러 방면으로 생각 중이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지만 작업을 소개함과 함께 연구의 큰 틀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이런 기획의 첫 번째 단추로서 ‘볼 수 있는 것 visible과 볼 수 없는 것invisible’이라는 시지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저의 주장의 큰 틀은 니체의 유명한 말에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선악의 저편)


  작품 왼편에는 흰 캔버스가 천장 위에서 아래로 펼쳐져 있고 중간에 큰 심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편 나무판에 작은 심연이 있습니다. 큰 심연은 우리가 바라보는 심연이고 작은 심연은 우리의 ‘바라 봄’입니다. 제가 앞서 이 연구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연구라고 한 만큼 이 심연이 의미하는 바는 ‘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이 두 심연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입니다.



   각각의 심연을 탐구하기 위해서 저는 두 철학자의 도움을 받아 생각을 전개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심연’은 ‘장 뤽 마리옹’이 제시한 퍼스펙티브(perspective; 원근법, 관점)에 대한 철학을 빌리고 두번째로는 ‘바라봄’의 심연은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분석한 것에 빌어 제 생각을 제시해 볼 것입니다.



 * 국어에서 ‘바라보다’의 의미는 ‘어떤 대상을 바로 향하여 보다’ 입니다. ‘보다’라는 표현이 프랑스어에서는 수동적인 봄(voir)와 의지를 가진 봄(regarder)를 나누지만 국어에서는 이 둘을 혼용해서 쓰기 때문에 ‘의지를 가진 봄’을 ‘바로 향하는 봄’이라는 뜻을 가진 ‘바라봄’을 그저 보이기 때문에 본다는 의미의 ‘수동적인 봄’과 구분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3-1.퍼스펙티브와 소실점(작품 왼쪽의 구멍)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우리가 응시하는 심연()과 우리의 눈의 심연(시지각적 주체)이 있습니다. 바라봄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까움과 멂을 지시해주고 우리의 시지각에 우리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에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퍼스펙티브’의 공간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퍼스펙티브는 ‘perspicuus(퍼스피쿠스)’로 ‘비침’, ‘투명함’을 뜻합니다. 장 뤽 마리옹그래서 이 퍼스펙티브를 ‘너무나 투명한 중심 un milieu si transparan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퍼스펙티브의 공간에서 우리의 시선은 그 투명함을 무한하게 가로지릅니다.


   퍼스펙티브의 공간은 봄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반면 소실점은 언제나 이 가능성을 너머서 존재합니다. 좀 더 자세히는 퍼스펙티브는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의 움직임이 계속되게 하고 봄의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시선에 어떤 종착지도 없기 때문에 가능성이외에는 시지각에게 어떤 ‘보이는 것’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일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퍼스펙티브는 시선이 끝없이 나아가기 때문에 봄을 가능하게해주는 지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중심의 끝에 너무나 멀어져 보일 수 있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는 공간을 ‘소실점’이라는 말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소실점을 프랑스어로 보면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실점은 프랑스어로 ‘point de fuite’ 입니다. ‘fuite’는 동사 ‘fuir(도망치다)’의 과거분사로 ‘도망치는 점’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우리의 시선은 퍼스펙티브의 투명함을 무한하게 가로지르며 이 점을 뒤쫓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도망치는 점’은 시선을 추격을 피해 무한하게 도망갑니다. 이 ‘점’은 언제나 시선 너머에 있기 때문에 ‘무한한 봄의 가능성’조차도 넘어서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시지각은 역설로 인해서 지탱됩니다. 1)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퍼스펙티브’가 보이는 것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줌으로서 가능하게되고 2)‘보임’을 가능하게 하는 ‘퍼스펙티브’는 시선에 잡힐 듯하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 ‘도망치는 점-소실점’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니 말입니다. 시지각에서 1)‘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음’에 의해 ‘보이게’ 되고 2)‘가능성’은 ‘불가능성’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3-2 눈(작품 오른쪽의 구멍)


시선이 나아가는 방향의 반대편에도 시지각에게 결코 보이지 않지만 보임을 제공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시선을 감각하게 해주는 눈입니다.


현재 미셸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분석한 것과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교차해서 보면서 생각을 정리중입니다.



이 연구에서 길잡이 삼아 세운 가설을 다음과 같습니다.


1)시지각을 가능하게하는 신체로서 눈은 대상이 아니다.

2)눈은 대상이 아니지만 신체이기 때문에 위치를 갖는다.

3)눈은 이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누구든 될 수 있다.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도’아니다. (퍼스펙티브의 투명성에서 봄이 한정되지 않는 것과 같이)

4)눈은 시지각적 주체의 이해(Comprehension)바깥에 언제나 실천(praxis)으로서만 본다.


3-3 자유의 가능성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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