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Michel Henri로부터 배우는 것, 혹은 그 진실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으로 촉구되는 것은 <몸; corps>과 <살; chair>의 구분이다. 앙리는 이 구분을 통해서 <삶; La Vie>과 <세계; Le monde>를 구분하며 더 급진적인 표현으로 «Il n'y a pas de place pour la vie au monde; 세계에는 삶을 위한 자리는 없다»라고 말한다.
먼저 몸은 어떠 어떠한 것으로 구성될 가능성을 지니고 <세계-내-존재;l'être-au-monde> 세계 내에서 관계를 형성하며 어떤 기능을,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살은 <현상학적 물질; La matière phénoménologique>로서 <자기-계시; auto-révélation>적인 <나타남; apparaître>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 matière이다.
달리말하면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우리의 미적판단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 finalité sans fin>이라고 말하면서 이 역설은 이 판단이 <개념>을 통하지 않는 판단이라고 할 때 이 개념화되지 않는 것, 즉 단적인 나타남(; apparaître)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살(; la chair)이다. 이 '살로부터 나타남'은 살이 사물로서의 물질(; matière en tant que chose)이 아닌 삶으로서의 물질(; matière en tant que vie)이 되게 하며 세계에 알려지지 않는 고유한 삶, 개인을 탄생시킨다.
[주체성과 책임에 대한 가설]
이 구분을 통하여 <세계에 삶의 자리가 없다>는 미셸 앙리의 입장을 고수할 때, 즉 삶이 세계를 가능하게 하지만 세계는 삶에 대하여 떠나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할 때, '세계'가 '나'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이며 '내'가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체로서 책임을 갖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나의 고유한 생 ma propre vie'에 대하여 또한 '타인의 생 la vie de l'autre'에 대하여 또는 '우리의 생 notre vie'에 대하여이다.
이 행위는 세계의 기능(; fonction)과 위치(; situation)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로 하여금 개인에 대한 책임 있는 윤리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하는 정치 politique를 생산하도록 요구한다. 삶은 세계에 대하여 무지를 생산하며 이 원초적 무지는 세계가 사유하도록 요청한다(이 요청을 police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politique이라 하겠다).
사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수학적 계산이 아니며 영원한 굴레가 아니다. 진정한 사유는 새로움에 대한 사유이며 이 새로움은 근원적 무지로부터 탄생한다. 이 근원적 무지는 곧 한 사람의 '살'이며 '삶'에 대한 무지다. 그 무지만이 삶을 실존을 알려준다. 그 무지는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함으로 우리의 살의 실존을 증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