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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13. 2024

단어 34

:사랑(3)

사랑으로부터 인식론을 정초 하기 위한 가설(3)
: 몸: 존재와 무한 (다음글은 '살: 삶과 영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 전서 13장 7절)"

사랑이 먼저 삶을 사랑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을 뜻할 때, 사랑은 단적으로 근원적인 "할 수 있음"의 힘이다. 우리는 이 힘 가운데에 있으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할 수 있음"은 우리의 개별적인 할 수 있음, 즉 어떠 어떠한 사유, 어떠 어떠한 행위, 감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어떤 가능성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이 '가능성의 가능성'에 있다면 우리는 이 가능성 중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온전한 가능성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어떤 방향성도 가질 수 없다. 이는 우리의 가능성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 온전하기 때문이다. 이 '나누어지지 않는 가능성'우리는 '무한'그리고 '영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단어 '무한'과 '영원'을( 잡히지 않는 의미로 인하여 쉽게 혼동될 수 있는 이 두 가지 힘)을 생각해 보자.  하나는 '몸', '존재'의 '무한'이고 다른 하나는  '살', '삶'의 '영원'이다.

'하나'와 '무한'

우리가 선택지가 무한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 '하나'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상학적('나타남'에 대한 사유)으로 또 초월론적(근원에 대한 사유)으로 표현하자면 세계에서 '하나'의 근원적인 나타남 속에서 모든 것의 사유는 가능해진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유는 이것을 보여준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봄의 단적인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최초의 '현상'은 삶의 바깥에 나타난다. (사유는 그 자체로 세계의 열림이다. 이 열림은 불가능한  그 열림의 현상이 근원적 '하나'의 관념을 제시한다. ). 그 관념은 우리에게 명확한 '봄'의 단순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가 '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이 근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될 수 있다. 즉, '둘'은 '하나와 하나'일 때에만 우리의 사고에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근원적 양태는 '나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즉, 최초의 '하나'는 최초의 분리 '하나와 하나, 둘'에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것, 그러므로 사유하는 주체의 '주체(sujet)'와 '대상(objet)'의 '분절'에도 '앞선'다는 것은 이 '하나'의 외부적 표상이 '삶'의 내재성과 혼동되게 한다.

그러나 삶의 자기 계시(l'auto-révélation du Soi)는 이 나타남과 구분되며 외부적 열림으로, 가능성의 열림으로 도래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근원적인 '하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나타남' 그 자체의 행위이며 그 '나타남'의 행위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할 수 있음"은 "무한"인가? 우리는 이 고찰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근원으로서의 '몸' '영원한 가능성'으로서의 '살'을 분리하고자 시도한다. 여기에 하나의 명제를 세워보자 ; «무한은 '세계의 열림'이고 영원은 '삶의 계시'다».

 '무한'은 그 의미가 헤겔이 '나쁜 무한'이라고 지칭하는 '하나의 무한한 연속'으로서의 무한이 아닐 때 단순하고 명징한 '하나'로 흠없이 정교한 정수의 세계 속 정연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한'은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순수한 다수'다. 정연하고 고귀한 단순한 '하나'로 셈해지지 않는 다수, 그 다수의 절대적 '무한'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다수'는 우리의 사유에 비어있으며, 나타나지 않는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집합론에서 Ø 이 모든 가능한 집합에 나타나지 않은 채로 모든 집합을 가능하게 함과 같다. Ø의 기표는 기표의 취소, 이름의 거부다.


순수한 다수는 그러므로 {Ø}와 같이 '하나'의 집합으로 셈해지기 이전에 (비록, 그 안에서도 셈해지기가 거부되지만) 우리의 인식의 가능성을 벗어나는 Ø이다. 셈해지지 않는 이 비어있음은 '절대적 다수'인 무한이며, 세계 속에서는 (즉, 집합 안에서는) 비어있음으로 단절로 균열로 상처로 나타난다(이 균열, 상처는 바로 고통의 기표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의 기표와 고통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반면 집합으로 셈해지지 않은 Ø는 집합 속에 있지 않다. 이' Ø '를 바디우는 존재의 고유명이라고 한다.

이 보이지 않는 고유명, 실존의 비어있는 흔적, 상흔은 바로 우리의 '몸(corps)'이다. 몸에 대하여 고찰한 장 뤽 낭시 두 텍스트를 인용해 보자.

 "몸은 실존에 자리를 제공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은 본질은 전혀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몸이다.(장 뤽 낭시, 『코르푸스』, p.19)"

 " 스스로 저 자신 안에서 꺼지고 붕괴하면서 우주 내에, 천체와 그 천체의 가공할 만한 밀도 한가운데에 물질의 부재라는 검은 구멍(블랙홀)을 여는 천체, 형이상학의 몸이나 계시적 신비의 몸, 또는 화육의 몸이나 의미의 몸이 최종적으로 하나의 구멍이라는 사실은 별반 놀랍지 않다. (...) 기호의 절대적 함축, 순수 지각 그 자체로 드러나는 순수 의미, Hoc est enim corpus meum(; 주의 몸이 바로 여기 있다), (...) 여기의 hoc는 외부성의 완전한 부재를 (...) 저 스스로를 삼키는 고유성(le propre)의 무한한 흡수를 지칭한다. (장 뤽 낭시, 『코르푸스』, p. 75)"

우리가 '몸'이 실존에 자리를 제공한다고 하였을 때 낭시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몸'은 '자리'이지 실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몸은 전적으로 하나의 구멍, 비어있는 기표이다. 따라서 '몸', 그 자체로는 '실존'의 '빈자리'이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고통, 모든 살의 '자기를 견디'는 근원적 고통의 '빈자리'다. (Cf. 플로티노스의 관조 속 초월하는 영혼은 몸으로부터 출발하여 일자로 초월하였을 때 어떤 것도 더해질 수 없기에 '비존재'가 더해진다.)

그러므로 몸이 실존의 '빈자리'라는 것은 '몸'이 삶을 견디는 근원적 자기-정감(auto-affection du soi)의 '비어있는 기표'라는 것이다. 몸은 모든 표상의 보이지 않는 근원적 표상이며 그 자체로 존재론이다. 몸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존재'는 실존하는 것과 실존하지 않는 것에 무관심한 순수하게 비어있는 이미지이며, 모든 것이 그 이미지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존재함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그러므로 실존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 존재는 실존하는 고통과 실존하지 않는 고통에 차이를 두지 않고 자신의 존재의 빛을 '모두'에게 제공한다. 반면 살은 삶의 실존을 감내하며 그럼으로써 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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