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부터 인식론을 정초 하기 위한 가설(2)
사랑이 가장 가난한 인식조차 가능하게 만드는 그 가능성인 것은 사랑이 불가능성에 대한 무력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페소아가 "사랑은 사유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의 인식으로 붙잡는 것이 불가능한 이 순수한 사유를 생각해 보자. 사랑이 순수한 것은 이 사유행위가 어떤 것도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말해 사유로서 주체가 사유 대상을 '소유하지 않음'에 있다. 요컨대 어떠한 목적성으로 점철되지 않는 행위 자체라는 것이다. 이 정의가 놀라운 것은 사랑이 사유의 가능성 자체를 넘어서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현상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후설을 따라 말하자면 모든 의식은 지향적 의식이며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사랑은 사유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역설적 질문이 있다.
1) 사랑이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 인식일 때 사랑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며,
2) 다른 하나는 그 지향적 의식이 그 대상을 잃을 때 과연 무엇으로부터 촉발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 또 다른 하나는 두 번째의 어떠한 촉발을 가정하더라도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실존을 그 순수 행위 안에서 주장할 수 있는가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사랑이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우리 사유의 대상화(; objectivation)를 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유 형식을 지향적 의식 즉 '어떤 것'에 대한, 즉 어떤 'x'에 대한 사유라고 할 때 궁극적으로 'x'는 우리의 사유 앞에 놓인다. 즉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사물이 그 자체로서 말해지는 것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사물로 우리 앞에(; ob-, 앞) 던져졌다(jet >'jeter'; 던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소유하지 않음', '붙잡지 않음'의 성격은 개념화(conceptualisation)를 반대하며 대상화(objectualisation)를 반대한다.
개념(concept)은 함께(con-) 그러잡는 것 ( cept; 잡다)이며 대상은 사물(chose)의 있는 그대로(en tant que tel)가 아닌 주체의 '앞에'있는 것으로서 그 근원적 위치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더 정확히 그 현상(apparence)이 아니라 '나타남의 나타남'인 근원적 나타남을 훼손하지 않는다. '사랑받는 자'는 우리의 사유의 대상으로서 '앞에'서지도 않으며 어떠 어떠한 내용을 가짐으로써 '나'라는 생각하는 주체에게 '붙잡히지' 않는다.
둘째로 이렇게 대상화가 거부된 사랑으로서의 사유는 대상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대상 없는 사유는 도대체 가능할 것인가. 장 뤽 마리옹의 철학을 빌려보자. 대상적 사유는 '함께 붙잡음'으로서 사유(우상; idole)의 내용을 갖지만 반대로 마리옹이 제시한 '이콘(; icône)'은 시선을 부른다(; convoquer) 그러나 시선은 대상으로서 그러잡는 것이 아닌, 즉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연다. 봄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열리면서 지속되며 순수한 행위가 된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보는'행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타자의 시선을 본다는 것은 타자의 동공의 모양을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이 아닌 타자의 시선이 열리는 것, 즉 그 시선을 바라보는 주체의 '봄'으로부터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것으로의 열림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로부터 또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열리는 순수한 행위는 지향성의 내용 없는 순수한 형식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대상화의 위협을 피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자의 실존과 사랑받는 자의 실존조차도 비어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순수 행위를 우리는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이제 세 번째, 즉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의 실존의 문제를 살펴보자. 순수한 사랑이 대상화를 거부한다는 조건보다도 우리의 경험에 가장 밀접한 조건이 있다. 사랑은 단적으로 느끼는 것이며, 우리는 그 즐거움과 고통을 감내한다. 그리고 우리가 '느낀다'는 것,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고통'은 '의식에 반하여'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는 고통과 주체 사이에 '거리 없이' 못 박혀 있기 때문이다.
'감각함', '느낌'의 문제는 감각하는 '살'(미셸 앙리의 표현으로 '현상학적 물질')과 '거리 없이' 맞닿아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지향성도 허용되지 않는다(지향할 수 있는 거리가 부재하므로). 요컨대 우리의 '고통'의 나타남과 '고통의 판단'은 다르다. 고통은 언제나 순간의 영역이며 판단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의 형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흐름 속에서 순간은 언제나 사라지는 것이며 따라서 흐름의 형식 속에 포섭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후설; 『시간 의식』참조). 우리의 근원적 감각은 즉 나타남을 가능하게 하는 나타남, 느낌을 가능하기 하는 원초적 느낌은 주체와 구분할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실존할 수 있게 한다.
사랑은 먼저 그 근원적 무게인 자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감내함에 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 전서 13장 7절)"라는 사랑의 정의는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효과가 아니다. 사랑은 먼저 삶을 사랑함으로써 있으며 우리는 삶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감내한다. 우리가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삶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을 즉 삶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유의 순수한 행위와 사랑을 어떻게 관계 지을 수 있는가 페소아의 말처럼 사랑은 '사유'일 수 있는가? "진리와 사랑은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장 뤽 낭시, 『코르푸스』)"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나의 사유를 역행함으로 나를 '만지'고 '밀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를 찌르고 아프게 한다. 이 근원적으로 '침투할 수 없는' 나와 타자의 살이 소유없이 사랑으로서 밀어내는 것은 그러므로 '진리'를, '삶'을 계시한다. "나의 진리가 당신 안에 있나이다"라는 고백은 당신의 삶의 진리가 내가 떠나온 나의 진리임을 계시함을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너'를 사유함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통하여 세계에 감춰진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사유: 너는 '나'의 세계에 구멍을 뚫고 '나'의 침투될 수 없는 살을 만지고 '나'를 세계에서 '삶'으로, '진리'로, '근원적 사랑'으로 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