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오는 선물 중에 정아 씨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화분이다. 꽃은 잠깐 피는데 물은 매일 줘야 하고 햇빛에 바람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게다가 그렇게 신경을 써도 기본적으로 사무실은 화초가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 까딱하면 죽어버리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아무 관심도 없다가 죽은 화초를 보면 꼭 한 마디씩 하는 회사 사람들, 아니 회사 아저씨들은 얄밉기 짝이 없다. 물이나 한번 주고 말하지.
am 7:35
"정아 씨, 좋은 아침~"
한차장은 마케팅부서에서 정아 씨에 이어 일찍 출근하는 멤버다. 정아 씨는 한차장의 삼촌인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한전무의 사무실을 정리하고, 문제의 화초들에 물을 주고 특히 한전무가 아끼는 난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둔다. 커피머신에 원두까지 세팅하고 처음 내린 커피는 본인 몫으로 들고 앉아있는다. 아침 시간은 번잡스럽긴 해도 정아 씨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하는 일은 짜증 나는 일뿐이지만 커피 한 잔의 여유와 고요가 있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정아 씨, 나도 커피 한 잔 플리즈"
되지도 않는 윙크를 하며 주접을 떠는 한차장이 그 고요를 깨지기 전까지 말이다.
한차장은 최근 정아 씨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하루 일과에 추가한 듯 매일 다양하게 구린 멘트를 날리고 있다. '정아 씨는 길쭉길쭉해서 원피스가 차암 잘 어울려? 쪼금 부족한 볼륨감도 보정해 주고 말이야, 아주 센스 있어 정아 씨. 요새 키 큰 여자가 대세라던데 나도 유행 한 번 쫓아 볼까나(하하)' 이런 식의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한차장. 한차장이 하는 이야기는 뭐 하나 불쾌하지 않은 것이 없다. 게다가 더욱 짜증 나는 것은 주변의 반응인데, 그래도 한차장의 관심이 썩 나쁘지는 않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47살 한차장과 38살 정아 씨가 적당히 어울린다는 것이다. 정아 씨는 억울함에 거울 속 얼굴을 꼼꼼히 확인한다. 속눈썹은 잘 발렸는지, 파운데이션이 들뜨지는 않았는지, 입술이 중간만 지워지지는 않았는지 살피며 화장을 수정한다. 화장을 수정하며 정아 씨는 피부 마사지샾 정기권을 끊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다 한 편으로 생각한다. 한차장이 돌싱만 아니었음 한 번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성격도 별로고 얼굴도 별로지만, 그래도 한전무 조카니까 끗발은 괜찮을 거 아닌가. 아 아니다. 그 남산 같은 배는 못 참을 거 같기도.
정아 씨도 뭇 남성들의 관심과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때가 있었다. 22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정아 씨는 '사장실의 예쁜 신입 비서 미쓰리'라는 말로 설명됐다.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는 정아 씨의 자랑이었고 회사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됐다. 호감 가는 인상이라는 이유로 신입임에도 사장실 막내 비서로 배치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정아 씨는 당연히 당시 근무하던 건설사에서 직원 중 하나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퇴직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아 씨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과 함께 퇴직을 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던 시대였으니까. 특히나 정아씨 같은 비서직의 경우 공채 출신 선임비서를 제외하면 대부분 20대 초 중반에 파견직에 딱히 경력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말 다했지. 비서직 중에 30대는 손을 꼽았으니 정아 씨가 그런 꿈을 꾼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파릇파릇한 20대를 지나 사회에 찌든 30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30대 후반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뿐이다.
"미쓰리(정아 씨) 커피 한잔 플리즈"
한차장 다음으로 출근하는 것은 보통 정대리다. 한 겨울에도 항상 스타벅스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출근하는 정대리는 멋 내기를 좋아한다. 꾸미기를 좋아해 머리도 항상 가르마를 싸악 넘겨 헤어제품으로 고정으로 하고 의상에도 매우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다. 매일 거울을 보며 면도 상태를 확인하고 브랜드에도 관심이 많아 남들이 다 알만한 고급브랜드의 지갑 들고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명품 수제구두를 제작하여 신고 다닌다. 정대리가 입사했을 때 팀원들이 나이가 비슷한 정아 씨와 정대리를 커플로 엮어 장난을 치는 일이 많았는데 '전 연하는 안 만나요.'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아 씨는 넥타이에 조끼까지 쓰리피스 양복을 고수하는 정대리 같은 스타일은 피곤하고 재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대리의 고정멘트다.
"한 차장님 오늘 셔츠색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아니 연 과장님 오늘 원피스 처음 보는 건데요? 형님이 선물하셨나 봐요?"
"어? 정아 씨 립스틱 색 바뀌셨네요. 이건 너무 쿨하다. 정아 씨는 가을 웜톤이라 형광빛 도는 핑크톤은 좀... 이것보단 L사에서 이번 시즌 한정으로 나온 A시리즈의 컬러가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정대리는 주변 사람의 외모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캐치하고 또 뷰티제품에도 해박하다.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조용한 아침을 즐기던 정아 씨에게는 한차장과 마찬가지로 방해꾼일 뿐이다. 사실 정대리는 객관적으로도 너무 수다쟁이다. 정아 씨에게 말을 제일 많이 거는 것도 정대리인데 정아 씨랑 특별히 친해서가 아니라 정대리가 워낙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차장이 한전무의 조카라는 사실도 알음알음 알던 것을 모두가 알게 소문낸 것이 바로 정대리이고, 연과장이 셋째를 가졌다가 유산한 사실을 인사과장에게 말해 팀을 뒤집어 놨 던 것도 바로 정민수 대리였다. 그리고 정아 씨의 전 남자친구가 바람이 나 헤어진 것을 탕비실에서 걱정하는 척 모두에게 이야기하다가 걸린 것도 다름 아닌 정민수 대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아 씨가 매일 쓰는 분홍색 자립식 거울은 전 남자친구가 사준 것이었다. 정아 씨는 전 남자친구와 5년이나 사귀었고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그의 빈곤한 재정상태와 깔끔하지 않은 여자관계로 인해 결국 파경을 맞았다. 정아 씨는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일주일이나 결근을 하고 엉엉 울었는데 회사에는 어머님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사실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너무 슬퍼서 그의 배신에 마음이 아파서 운 것이 아니라 이 나이 먹도록 시집도 못 가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 운 것이라, 정대리가 괜찮냐는 연락을 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이별 사실을 말했더니 소문이 쫙 난 것이다. 이 일로 정아 씨는 정대리를 완전히 입 싼 떠벌이로 콱찍었다. 성격이 좀 유난스러워도 겉보기에 멀끔하고 신입사원 때는 몰랐는데 일도 곧잘 해서 돌싱인 한차장보다는 그래도 정대리가 낫겠다고 속으로 저울질했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정아 씨 삶의 낙은 일주일에 한 번 사무실에 들르는 영호 씨다. 정아 씨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정수기는 생수통을 꽂아 사용하는 구식 정수기로, 영호 씨는 생수 납품 회사의 배달원이다. 정아 씨는 영호 씨가 2살만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매일 하고 산다. 주변 사람들에게 듣기로 영호 씨는 29살 청년인데, 말없이 묵묵하게 생수통을 나르는 영호 씨를 정아 씨는 매번 안 보는 척 훔쳐본다.
"정아 씨, 또 영호 씨 보는 거야아?" 연과장이 슬쩍 묻는다.
"아아니, 과장님은 내가 뭘 봤다 그래요." 정아 씨가 말꼬리를 늘이며 한 발 빼자 연과장이 푹하고 웃고는 다시 자리로 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인상을 쓴다. 정아 씨는 종종 연과장에게 업무시간 중 딴생각을 하다가 들키곤 하는데, 그것이 좀 불만이다. 솔직히 이 작은 회사에 할 일도 많지 않은데 연과장은 항상 일을 찾아서 욕심 있게 해야 업무가 확장되는 것이라며 열변을 쏟는다. 그럼에도 연과장과 정아 씨는 산책 친구로 점심식사 후 회사 근처 공원을 커피 한 잔과 함께 거닐곤 한다. 점심시간에는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웃기도 많이 하는 연 과장이지만 정아 씨가 영호 씨를 훔쳐볼 때나 혼자 망상에 빠져있을 때면 바로 눈치채고는 꼭 한 마디씩 하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영호 씨의 등근육을 유심히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정아 씨에게
"잿밥에 관심두지 말고 전무님 출장비 처리 마무리나 해주세요."라고 해 정아 씨를 당황시켰다.
정아 씨는 그 순간 얼굴이 새 빨게 졌지만 연과장의 말이 틀린 곳이 없으므로, 속으로 씩씩대고는 며칠간 점심 산책을 이런저런 핑계로 피했었다. 정아 씨는 솔직히 연과장이 너무 일 욕심이 많은 것이 여자로서 매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그래도 결혼해서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당연히 엄마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연희진 과장은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연년생 아이 둘을 낳으면서 생긴 긴 업무 공백은 결국 한 때는 연과장의 자존심이었던 회사를 퇴직하게 했다. 정아 씨는 이 부분에서 좀 놀랐다. 직업에 대한 연과장의 애착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정아 씨에게 직장이란 결혼 전까지 잠시(정아 씨의 예상보다 상당히 길어지고 있지만) 거쳐가는 곳인데, 연과장에게는 상당한 의미로 보였으니 놀랄만하다. 연과장은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복직을 준비할 정신이 생겼다고 한다. 그 사이 첫 회사에 입사동기였던 연과장의 남편은 팀장을 달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승진을 했다. 연과장은 남편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두 달간 독박육아에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며, 육아에는 왜 승진도 특근수당도 없는지 열변을 토했다. 정아 씨는 연과장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은 내 팔자가 낫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느라 정신없는 연과장을 볼 때면 내심 정아 씨는 연과장이 샘통이라고 생각한다. 연과장도 정아 씨의 짝사랑을 종종 주책이라며 놀리기 때문이다. 정아 씨가 짝사랑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정아 씨는 주책이라는 말이 너무나 기분 나쁘지만, 기분 나쁨을 표현할 라 치면 연과장이 주제를 돌리곤 했으므로 정아 씨는 연과장이 은근히 여우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아 씨가 속으로 아무리 정신 승리를 하려 해도 연과장의 커리어와 일에 대한 열정은 사장님도 다 아는 일이라 곧 차장 승진을 한다는 게 정론이고 정아 씨는 또 커피를 타고 있을 뿐이다.
정아 씨는 생각한다. 22살 미쓰리에서 38살의 정아 씨가 되기까지 변한 건 무얼까.
화초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나 저 화분들이나 비슷한 꼴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방긋방긋 웃으며 늙어간다. 매일같이 물을 주고 햇볕을 주며 간신히 간신히 살아간다.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들어 정아 씨는 립스틱을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