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와 함께하는 유난한 하루일과
곧 죽어도 직장인의 가오는 정장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정민수 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회사를 갈 때는 항상 몸에 꼭 맞춘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머리는 가르마를 타서 깔끔하게 넘긴다. 눈썹정리와 비비는 필수다. 오늘의 착장을 찍어 #ootd라는 태그와 함께 개인 SNS에 올린다. 곧 울리는 알람에 뿌듯해한다. 그리고 늘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와서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7시부터 문을 여는 스타벅스가 회사 근처에 있다는 것이 이 회사의 유일한 장점이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음, 음"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아침이라고 잠에서 깬 목소리로 인사하는 것은 정말 최악이다. 집 밖에서는 항상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프로 사회인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민수 씨다.
am 8:05
"좋은 아침입니다. “
아침인사가 끝나면 업무 준비와 함께 조직원들의 변화를 눈여겨본다. 배불둑이 한차장에게는 가볍게 넥타이의 색매치를 칭찬한다. 사실 정대리는 한차장의 비싼 넥타이들이 한차장으로 인해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차장이 최소한 배라도 안 나왔다면 그리도 원하는 재혼 근처에 가볼 수 있을 텐데. 연 과장님은 어쩐지 조금 무섭다. 같은 업무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차부장급 업무를 커버하는 연과장은 정대리의 스몰토크를 잘 받아주지 않는 데다가 업무에 있어서는 칼 같아서 주눅이 든다. 업무가 시작되면 민수 씨는 거래처와 통화하는데 오전 시간을 다 쓴다. 사실 메일로 진행해도 되는 내용도 많지만 정대리는 전화로 직접 통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정도 쌓이고 신뢰도 쌓인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정대리도 점심시간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회사 앞 헬스장에서 40분간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고 씻고 나오면 바로 오후 업무시간에 딱 맞는다. SNS에 #오늘운동완료 라는 태그와 함께 운동 인증샷을 올린다. 이 맛에 점심운동을 하지. 한차장은 이를 보고 ‘역시 MZ세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해’라며 마치 본인이 젊은 감각을 가진 상사인척 군다. 그럴 때마다 정대리는 기가 질리는 느낌을 꾹 참고 생각한다, 내가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이지 모든 MZ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정대리의 목표는 이직이다, 나름 이름이 알려진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의외로 빡빡한 취업시장에서 쓴 맛을 보았다. 취업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걱정도 늘어갔기에 민수 씨는 자기 자신과 타협하여 이 회사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도 나름 중견기업에 다니고는 있지만 경력을 살려 대기업으로 이직하고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베스트다. 물론 지금 여자친구는 없지만 곧 생길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나 정도면 꽤 괜찮지’라는 믿음.
민수 씨가 이직과 결혼 같은 암묵적인 사회의 룰에 목을 매는 이유는 따로 있다. 대학교 재학 중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민수 씨는 이때 어린 상주 노릇을 하며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조문객을 받는 민수 씨를 위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수 씨를 동정했다. 위로와 동정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동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민수 씨는 다짐했다. 남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건실한 청년으로,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어머니의 자랑이 되기로.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가장을 잃어 가족의 금전적 위기를 걱정했는데, 보험금과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에서 나온 위로금등으로 목돈이 생겼고, 교사인 어머니의 연금으로 노후준비가 되어 모자람 없이 약간의 사치도 하며 살았으니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하 간에 그때부터 민수 씨는 주위 평판에 무척 신경 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민수 씨의 다짐을, 목표를 이루려면 이 회사에서 한번 더 도약이 필요하다. 최근 목표한 회사의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민수 씨는 무척 당황했다. 서류전형은 경력으로 충분히 커버하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깐깐하구나, 면접은 정말 자신이 있는데. 하지만 면접을 보려면 서류에 붙어야 한다. 민수 씨는 제출했던 이력서를 찬찬히 다시 읽어본다. 아무래도 탈락의 이유는 직무 전문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 때문 아닐까 하는 판단을 내렸다. 민수 씨는 곧바로 기술사 학원에 등록했다. 주말은 이제 한동안 기술사 공부와 함께 할 것이다.
오후 3시가 되면 배가 슬슬 고파진다.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와 회사 오는 길에 마시는 커피, 점심은 거르니 당연하다. 민수 씨는 100% 국산콩을 갈아 만든 두유를 한팩 마시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주로 대화 대상은 오후 업무가 별로 없는 정아 씨나 한 차장이다. 김 부장님은 말수가 적고 소심한 편이라 좀 젠체하는 게 재수 없지만 말동무로는 한차장이 딱이다. 사실 한차장도 정대리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 오늘 정아 씨는 약간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멍하다. 정아 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맘고생을 크게 했는지 요새는 좀 조용하다. 누님에게 회사의 낡은 커피머신으로 내린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준다. 이거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뜻인데, 정아 씨는 아는지 모르는지 고맙다며 웃는다.
민수 씨가 연과장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그가 이직해 이 회사에 오고 나서 칼퇴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연과장은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항상 전투적으로 일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바쁘게 인사하고 퇴근한다. 정대리는 그 덕에 슬슬 퇴근 시간을 앞당겨서 이제는 은근슬쩍 칼퇴무리에 끼게 되었다. 뭐 어차피 한차장도 정아 씨도 칼퇴했었으니 그리 눈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늘도 슬쩍 일어나 인사를 하는데 한차장이 발목을 붙잡는다. ‘비도 오는데 막걸리에 파전콜?’ 망했다. 다른 눈치 빠른 직원들은 슬쩍 인사하고 집으로 가고 정아 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할 일이 없다며 콜을 외친다. 정민수 대리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