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의 연속이므로 자기 확신은 퍼즐 조작이 맞추어지는 것처럼 자리 잡게 된다. 유혹적이기에 일탈은 쉽고, 지루하기에 꾸준하게 행동하는 건 어렵기에 원칙을 지키는 기술이 요체다. 현상에 맞추면서 어떻게 대응하느냐!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사고파는 걸 반복하면 반드시 반전한다. 인간 본성의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도구로서의 투자여야 한다. 감정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제대로 사는 건 각자의 마음 먹기다. 작은 습관들이, 오늘이 모여 작은 것들과 유사한 형태의 삶이 된다.
파울루 코엘류는 「연금술사」에서 ‘모래사막은 메마르고 사람들을 시험하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찾아가는 사람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다’라는 삶이 지향점을 또렷하게 제시한다. 2020년대가 시작된 지금의 현대 사회를 ‘VUCA’ 시대 즉 이는 불안정(Volatility)하고 불확실(Uncertainty)하며 복잡하고(Complexity) 애매모호한(Ambiguity) 사회라고 말한다. 자본시장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이 없을 듯하다. 시장에서의 행위는 (오롯이 확률로만 설명되기에) 시장 자체가 복잡하고,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으므로 단순화할수록 명확해지게 된다. 시장은 불안정하고 변동성은 크고 불확실성의 연속이므로 자신을 믿어가는 자기 확신이 깊어질수록 선명해지는 구조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복잡계를 단순계로 자신에게 이해시키려는 사투의, 그렇게 단순화시킨 것들을 명료하게 뇌리에 각인시키고 실천하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자기 확신은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지는 것처럼 자리 잡게 된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색들을 쌓으면서, 파동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깊어지면서, 그렇게 치열한 시간이 거듭되면서 투자자의 미래 가능성을 향한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은 서서히 지속성을 담보 받게 된다. 결국 파동을 그리면서 투자한다는 건 자기 확신의 시험장이자 자기에게로 가는 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에 대한 무한긍정이 자기 확신이다. 투자를 통해 꿈꾼다는 건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여정과 진배없고, 오아시스는 각자의 내면 어딘가에 있다.
그녀는 마침내 행복했던가? 아주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의심과 자신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거울 앞에서 옷을 벗을 때면 그녀는 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어떤 때는 자기 몸이 자극적이라고 느끼고 어떨 때는 무미건조하다고 느끼곤 했다. 그녀는 자기 몸을 타인의 시선에 내맡기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커다란 불확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희망과 의심 사이에서 망설이긴 했어도 그녀는 이전의 너무 조숙했던 체념에서는 확실히 벗어났다.
<삶은 다른 곳에 – 밀란 쿤데라>
의심과 자신감 사이를 왔다 갔다,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의 경계마저도 애매모호한 이게 인간의 보편성이므로 투자자는 끊임없이 마음이란 집을 청소해야 한다. 다잡고 있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정에 자꾸만 섞이는 불순물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샘솟는 성급함이 욕심과 어우러져 한바탕 춤판을 벌이기 전에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육신에 끼는 때처럼 마음에도 때가 그만큼씩 붙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인간의 삶이란 게 거의 공통으로 일탈은 유혹적이고 바르게 행동하는 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유혹적이기에 일탈은 쉽고, 지루하기에 꾸준하게 행동하는 건 어렵다. 어렵기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투자는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과 더불어 인간적 성장이라는 정신적인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도구다.
아인슈타인은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같은 감정의 기복을 반복하면서, 과거처럼 매매하면서 막연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미친 짓을 끝내고자 하는 노력이 투자에 있어 진정한 시작점이 된다. 원칙을 지키는 기술을 익히겠다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돈을 잃지 않겠다는 충만한 의지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원칙을 지키는 기술이 바로 잃지 않는 기술이다. 불확실성으로 자욱한 일정한 원 안에서 규칙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투자에서 다루는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잃지 않는 기술을 익혀가는 과정이 성장을 위한 필연의 과정인 돈이 되지 않는 구간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반드시 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것이 투자의 단계지만, 대다수가 핵심이 되는 돈이 되지 않는 구간을 건너뛰고 수익을 탐하기에 스스로 매매에 신뢰를 주지 못한 채 불안하고, 타인의 눈에는 불편하고 가족의 눈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잃지 않는 기술의 요체는 초심 즉 평상심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잃지 않는 법을 익힌다는 건 투자 묘목이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이며, 그렇게 나무가 자라나기만 하면 성장하는 건 자연의 이치다. 또한 잃지 않는 기술은 (성급함과 욕심을) 비워가는 기술이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 잃지 않는 기술은 수익 내는 기술을 잉태하면서 한 명의 진중한 투자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존 호머 밀스>
현상에 맞추면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투자의 성패는 결정된다. 지수가 하락하는 구간에서도 중수는 크게 잃지 않지만, (감정과 이성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뤄 감정에 크게 휩쓸리지는 않지만) 고전분투하게 되고, 상수는 하지 않음으로써 여유로움을 더한다. 데이트레이딩의 박스 구간에서는 중수는 상단 매도나 하단 매수하면서 크게 잃지는 않지만, (유행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공포 심리를 의미하는 FOMO(Fearing Of Missing Out) 증후군 즉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 대중의 고취에 고점을 넘어설 것만 같고, 나만 놓칠 것 같고, 나만 두고 갈 것만 같은 초보 단계에서는 벗어났으므로) 상수는 에너지를 모을 때까지 기다려서 쉽게, 크게 수익을 낸다. ‘후회 = 선택 – 실제 결과’를 후회 방정식으로 놓았을 때 하수일수록 실제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기에 조금 나쁜, 더 나아가 조금 좋은 결과조차도 커다란 후회가 되기에 손실을 끊을 수도, 원칙을 지켜갈 수도 없는 것이다. ‘후회 = 정서적으로 가능한 것 – 실제로 가능한 것’으로 달리 정의했을 때도 하수는 실제로 가능한 것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기에 자그마한, 짧은 후회조차도 회피하려고만 하다가 후회의 늪에서 헤매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lower leverage = 0.3 정도를 유지하면 보다 더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으로 손실을 감내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이 바로 투자 심리의 핵심이고 이등변 삼각형의 왼쪽 아래 점에 해당한다. 오른쪽 아래 점에 해당하는 less isolation 즉 추격하지 않고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기다릴 수 있는 그 마음이면 투자의 알파라 할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습관처럼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삼각형의 두 점은 연결되어 직선이 되고, 직선은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였다는 것이고,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을 견디며 그토록 기다렸던 수확의 계절, 가을에 들어섰다는 의미이자 성급함을 극복했다는 의미다.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으로 (lower leverage로 천천히 길게 보면서) 추격하지 않고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기다릴 수 있다면 잃지 않는 투자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잃지 않는 투자를 할 수 있다면 남은 건 언제가 되었든 이익을 거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시간이 동일 선상 위에 또 다른 꼭짓점을 높이면서 누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동일 선상 위에서 더해가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ex-insight 즉 경험적 통찰은 깊어지면서 누적을 산처럼 쌓아 올리게 된다. 이것이 시장에서 스스로 깨친 성공으로 가는 공식이다. 이등변 삼각형은 투자자가 버티면서 누적으로 쌓아가는 각자 인생의 산이다.
주식으로 그나마 돈을 버는 방법은 아마 세 가지 정도일 것이다. 첫 번째는 몇 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하는 주가지수 고점 대비 40~50% 이상 하락한 시점에서 시가총액 상위 10위권 내의 종목 2~3개를 그냥 사서 1~2년 보유하다 꺾이는 시점에서 전량 처분하는 전략이다. 두 번째는 종목도 섹터도 모두 확률적으로만 존재하기에 언제 어디서 어떤 종목이, 어떤 섹터가 우위를 점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매번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는 대전제를 받아들이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자본주의는 반드시 우상향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전략이다. 생산 가능 인구 등 경제의 장기 성장을 가능성이 가장 큰 미국 지수 ELS에 1억 원을 한 번에 넣거나 월 백만 원씩 정액 분납방식으로 몇십 년 이상 투자하는 전략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한다는 조건) 수십 년간 S&P의 연평균 수익률은 약 10% 정도다. 1억 원을 한 번에 넣고 복리로 연평균 10% 수익률을 가정하면 25년 후에 10억이 되고, 40년 후에는 45억이 된다. 동일 수익률을 가정하고 월 1,000,000씩 적립하게 되면 25년 후에 원금 3억을 포함하여 약 12억 4천만 원이 된다. 결론적으로 대략 연 2%의 인플레이션(화폐가치의 하락)을 가정하면, 72 법칙에 의하면, 화폐가치는 약 35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겠지만 말이다. 세 번째는 우리는 모두 지극히 인간적이기에 확률적 사고에 취약함은 물론 필연의 감정의 기복을 고려하여 시소에서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있을 수 있도록 lower leverage = 0.3 공식에 따라 투자금 2/3는 MMF에 묻어두고, 1/3로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전저점 대비 약 5% 정도에서 loss cut line을 설정하여 1회 최대 손실을 10%로 잡는다면 설령 손실이어도 전체 투자금 대비 손실금은 3% 정도이기에 심리적으로 온전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사고파는 걸 반복하다 보면 반드시 반전하게 된다. less isolation 원칙에 따라 선에서 이격이 발생하면 절대 추격하지 않고, 손실을 짧게 끊어간다면 열에 한두 번은 강한 파동의 마디를 취하는 게 확률적으로 당연하고 그 수익률은 짧은 손실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2/3의 MMF 자금은 첫 번째 전략적 시점이 왔을 때 기회를 잡는 기회비용이 될 것이다.
편지를 마칠 때쯤 돼서는 자기가 신경쇠약에 걸렸던 것이 배 때문이거나 화가의 생각들을 좇아가느라 감내해야 했던 그 힘겨운 노역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모성애가 그 위대한 불륜의 사랑에 맞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자기 스스로 확신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한없는 슬픔만을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귀하고 비극적이고 강인하다고 느꼈다. 며칠 전에 오로지 그녀를 아프게만 했던 슬픔은 이제 거창한 말들로 치장이 되고 나니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행복으로 변했다. 그건 아름다운 슬픔이었고, 그녀는 그 슬픔의 우수 어린 빛에 의해 자신이 환히 밝혀지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이 슬프고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삶은 다른 곳에>
인간의 보편적 마음이 자기합리화로 행복과 불행을 가르기에 투자하는 마음이 이래서는 안 되지만, 이런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기에 원칙을 지키는 기술을 익히면서 원칙을 지키는 걸 지속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인간의 본능이 원칙과 동일 선상에서 조화롭기는 절대 쉽지 않기에 돈과 심리에 관한 독백인 「투자 심리 깨달음의 서」의 종착역은 아마도 ‘투자하지 말라’에 가까울 것이다. 우량주에 장기 투자하거나, 지수가 반토막 나면서 시장이 돈을 벌 수 있는 때를 만들어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현상에 따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할 수 없다면 말이다. 살면서 성급함이나 욕심 등과 같은 인간 본성의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도구로서의 투자가 아니라면 투자하지 않는 게 인생에 유익하다. 평범한 일상에 투자가 자주 끼어든다면 특히 숙면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적 사고로 무게추가 한참 기운 명백한 투기다.
힘겨운 순간마다 용기를 갖고 거침없이 뛰어들어라. 인생은 당신이 가장 피하고 싶고, 불편해하는 그곳에 평생토록 꿈꾸고 바라온 보물을 숨겨놓았으니까.
<니체>
마음대로 하기는 편하지만, 마음먹기는 불편하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 더더욱 불편하기만 하다. 하고 싶어 하고자 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들로 조금씩 채워가야 인생은 깊이를 더하게 된다. 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는 대로 따라가는 마음의 연속이면 투자자에게 축복이다. 일렁이는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 그 반짝거림을 윤슬이라 한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잔물결에 끝날 때까지 흔들리겠지만 흔들리기에 빛나는 윤슬이 되고 싶다. 부는 바람의 심술에 자주, 크게 흔들림은 이어지겠지만 투자하는 시간이 생의 반짝이는 윤슬이면 좋겠다. 시장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고, 흔들림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 흔들림을 애써 외면한 채 기대하는 마음은 물거품의 꿈이다. 물결이 흔들리지 않으면 반짝이는 윤슬은 없다. 후회나 아쉬움은 과거를 얽매여, 불안과 걱정은 미래가 두려워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알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과거는 그런 것, 알 수 없어야 하기에 미래는 그런 것이다. 감정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제대로 사는 건 각자의 마음 먹기다. 마음먹기에 따라 자주 윤슬이 된다. 난파(難破), 배가 항해 중에 폭풍우 따위를 만나 부서지거나 뒤집히는 것처럼, 난파(難波), 어지러운 파동을 자주 만나게 된다. 당연한 어려움의 거듭이어도 익숙해지는 법,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단단해진 심리라면 시장이란 바다에서 난파당할 일은 없다. 확률이기에 열 번 중 여섯이면 충분하고, 유리한 방향의 끝자락이라면 여섯은 충분하다.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틀린 네 번을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반복은 결정되고, 여섯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거듭해서 틀린다는 게 시장에서 불편의 법칙이다.
물결처럼 등락하는 걸 우리는 파동이라고 부른다. 프랙털(전체와 부분이 똑같은 형태가 무한히 반복되는 구조, 대표적으로 엘리엇 파동이 더 큰 파동 안에 작은 파동이 포함되는 구조를 의미함), 즉 자기 유사성과 순환성의 특징을 지니면서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게 파동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계절이, 밤과 낮이 순환하듯 파동도 등락하면서 순환한다. 프랙털 이론으로 돈을 벌기는 쉽지 않지만, 비슷한 형태를 반복하면서 파동은 등락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넉넉하다. 작은 습관들이, 오늘이 모여 작은 것들과 유사한 형태의 삶이 된다. 천 개로 이어진 하나하나의 독백들은 각자가 투자 심리에 관한 이야기이자 전체가 투자 심리에 관한 이야기로 가지, 줄기, 나무가 되는 프랙털 구조를 띤다. 하나의 잎이 모여 명제가 있는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고, 한 그루 투자 심리 나무가 되었다. 하나의 잎이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의 잎과도 같다. 접을수록 단단해지는 마음, 천 번을 접은 마음에서 단단함이 느껴진다. 거듭되는 글쓰기로 투자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씩 깨끗하고 맑아지는 것처럼 지속해서 파동을 그리다 보면 비슷한 것들에서 명징함을 보다 많이 발견할 것이다. ‘무작정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까지만 생각할 수 있다면’ 투자자의 성장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더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지속된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다. 투자자가 원칙을 대하는 마음은 이와 같아야 한다. ’이런들 또 어떠하며, 저런들 또 어떠하리‘ 이방원의 하여가다. 투자자가 현상을 대하는 마음은 이처럼 정반대여야 한다. 현상에 단심이어도, 원칙에 하여 해서도 안 된다. 오랜 세월 돌고 돌아 문밖에 섰다. 또다시 한참이 지났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어젖히고 자신을 믿어보아야 하는가? 촛불을 켜고 언제 끝날지 모를 기나긴 밤들을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가? 여전히 시장의 문밖에서 두 마음의 조화로움을 가늠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염주를 굴리고 있다.
생의 5분의 2를 머문 시장에서의 선하지 못했던 경험들과 경제적 자유를 위해 종이학을 접듯 몇 년의 세월 동안 이어진 천 개의 사색으로 내면을 통찰했다. 천 번을 접은 마음은 단단해졌다. 숱한 과정들로 사람이 변한다는 게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내면에서는 가야 할 길이 선명했지만, 변하지 않는 본성은 언제나 의지를 가볍게 제압하곤 했다. 원칙을 세우기를 거듭했지만, 바뀌지 않는 본성은 너무나도 쉽게 원칙을 꺾어버렸다. 자신이 변하기 전에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게 투자에 있어 불면의 진리다.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았기에 정답은 선명하기만 하다. 투자자는 자기감정을 이겨내고 침묵(沈默)하면서 황금을 캐야 하고,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실천(實踐)하면서 보람을 캐야 하고, 자기 고독을 이겨내고 신독(愼獨)하면서 인생을 캐야 한다. 투자자가 침묵한다는 건 사색할 줄 안다는 것이고, 실천한다는 건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고, 신독한다는 건 단식할 줄 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마술을 부릴 수 있으며,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소.”라고 말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색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고, 참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라고 「싯다르타」는 투자자에게 조언한다. 지식을 쌓아가는 것보다 자신을 알아가는 게 더 중요하고, 지혜로운 것보다 자신을 참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길은 자신 안에 이미 존재하며, 길을 찾아 사색할 줄 알고, 찾은 길을 따라 실천할 줄 아는 그것으로 원함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5줄 요약을 거듭하는 이유는 별은 오각형, 별의 순간을 위한 꾸준함의 다짐이다. 불확실한 확률의 세계에서 윤슬처럼 반짝이기를 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