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행성에서 살다가
k가 사는 세계는 단순하다. 눈앞에 뭔가 보이면 ‘이게 뭐야?’ 하고 묻는다.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묻는 게 아니다. 그냥 묻는 게 습관이다.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답변을 바로바로 듣고 싶을 뿐이다. k의 대화 형식은 아주 간단하다. 질문과 답이다. 일차원이다. 이차원으로 갈 것도 없고, 가지도 않는다. 언어가 한정되어 세계가 한정돼있는 건지 반대로 세계가 한정된 있어서 언어가 그렇게 나가는 건지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묻는 것과 같다. k는 어떤 일이 잘 안 될 때 그의 공식이 있다. 우선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가 안된다. ‘이게 왜 안돼. 에이 짜증 나.’ 그렇다. 첫째 짜증부터 낸다. 그리고 두 번째 그 짜증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며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휴일 아침을 늦게 먹고 아내가 설거지를 산더미처럼 싸놓고 전화통화한다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k는 조금만 냄새나고 그릇들이 얼른 닦이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걸 보는 게 싫다. 짜증이 슬슬 올라온다. 한번 통화하면 도통 끊을 줄 모르는 아내 스타일을 알기에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는데 집중이 안된다. ‘에이’ 결국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한다. 깔끔한 성격에 그냥 자기가 해버리고 말지 싶었다. 세재를 문지르고 헹구려는데 어라! 물이 안 내려간다. 뭐지? 이런 막혔나? 그렇다. 하수구가 막혔나 보다. 급 짜증이 난다. 대충 마무리하고 싱크대를 열고 하수구 관을 살펴보니 덕지덕지 뭔가가 잔뜩 끼어있다. 안방에서 아내는 아직도 전화 중이다. 슬금슬금 열이 받는다. 설거지만 하려 했는데 하수구까지 뚫어야 하는 상황이다. 테이프가 필요해서 거실 수납장으로 향한다. 불투명 유리문으로 된 수납장을 열어 테이프를 찾으려는데 안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찾을 수 없다.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여있다. 오래된 약봉지, 가위, 풀, aa건전지들, 모자, 솜방망이, 손톱깎이 등이 마구 뒤섞여있다. 으으! 짜증 대폭발이다.
“어이구, 이게 다 뭐야? 테이프를 찾을 수가 없잖아. 정리 좀 하고 살아. 이게 뭐야?”
물건을 다 꺼내 거실에 늘어놓고
열짜증을 실어 안방까지 크게 들리게 냅다 소리 지른다. 아내는 전화를 얼른 끊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온다. 남편 특유의 짜증 난 목소리를 아주 싫어하는 아내는 이미 반격할 말들을 장착하고 똑같이 화를 낸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왜 갑자기 할 일을 만들어? 지금 꼭 이걸 정리해야 해?”
“버릴 것 좀 버리고 살아”
“아이고, 애들 옷 버릴라 하면 버리지도 못하게 하면서 뭘 버리래.”
점점 요점과 먼 이야기로 문제 해결에서 멀어지고 서로에 대한 비난 모드가 만들어진다.
“하수구는 왜 이렇게 막히게 쓰는 거야”
“그냥 놔둬. 사람 부르면 되잖아.”
“내가 숙소 가면 전화해서 어떡해? 할 거면서”
“아이고 내가 해결하고 말지. 그리고 왜 그렇게 성질부터 내? 그 성질 좀 고쳐.”
부부는 이제 감정의 언덕에서 브레이크 없이 서로 경쟁하면서 달려 내려온다. 하수구는 뚫리고 수납장은 정리가 됐지만 부부의 감정은 여전히 막히고 정리가 안 됐다. 부부의 대화는 종종 막히고 정리가 안된다.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 같다.
“어이구, 이게 다 뭐야? 테이프를 찾을 수가 없잖아. 정리 좀 하고 살아. 이게 뭐야?”
“어머나 그러게. 너무 너저분하다. 미안, 뭐 찾아? 내가 찾아줄게”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짜증 내던 k의 반응은 어떻게 될까?
이런 말을 하려면 아내 몸에서 사리가 나와야 한다.
다른 행성에서 살다 온 두 사람이 지구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점에 끌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른 점 때문에 소통이 어렵고 대화가 쉽지 않다. 서로 끌어당기다가 밀어내기 바쁘다. 둘의 중력의 크기가 비슷해서다. 둘 중 하나의 중력이 세져서 포용하듯 끌어당기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태양이 행성들을 끌어당기는 거처럼. 그런데 그 태양이 되는 게 난코스다. 태양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글이글 자신도 타오르고 행성도 비춰야 한다.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이 태양신을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태양이시여.
그래도 태양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태양처럼 #다른행성 #금성과화성 #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