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소비하던 삶에서 경험을 소비하는 삶으로 옮겼다. 아직 완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소유욕을 내려놨다. 이 또한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다. 어떤 품목은 전부 중고 시장에 내놓고 다 처분했지만 여전히 서랍장과 수납장, 옷장 속을 차지하는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제 나의 소비 대부분은 자기 계발이나 경험에 쓰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귀한 경험, 아니 지금이 아니면 돈주고도 못 사는 경험이 더 중요해졌다.
그런데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나에게는 여전히 소유욕이 있다. 지식과 정보, 그리고 경험이 주는 느낌과 감각을 소유하려 한다. 사실 이것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나를 스쳐가도록 두면 그만인데 그 찰나의 감각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애쓴다. 사진기를 들고, 노트를 펴고, 필기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쓴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내 안에 꼭꼭 되새기기 위해서 말이다.
‘소유냐 존재냐’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소유 중심으로 기울어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인간다운 삶은 존재의 방식으로 전환할 때 가능하다고. 소유의 방식은 가지려는 태도다. 물건, 권력, 지식, 사랑조차 소유하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삶에 대한 깊은 안정, 안전, 자기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반면 존재의 방식은 살아내려는 태도다. 순간순간을 살아가며 경험하고 나누고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다.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 있느냐’가 삶의 기준이 된다.
나의 소비는 물건에서 경험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가지려는 태도는 버리기 어렵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책 속의 문장 하나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씨름한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삶이 주는 모호함을 통제하여 나만의 이해 방식으로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또 다른 소유의 형태가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그렇게 불편함과 괴로움 앞에서도 그저 삶과 함께 흔들리며 나를 드러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 그런데 여전히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다. 어리석은 마음임을 알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가져봐야 그것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알기 위해 가져 보려는 것인가... 가지지 않아도 내려놓는 법, 저항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