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은 그의 노래 <널 잊는 기적은 없었다>에서 누군가를 잊는다는게 '기적'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을 잊으려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라쿠나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기 시작하지만, 결국 돌고돌아 다시 클레멘타인과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기적과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요식 행위로써의 감정 싸움과 물리적 이별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주진 않는다. 막말과 욕설을 내뱉으며 언제 사랑했냐는 듯, 누구나가 이별할 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지만, 잊혀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도 하다.
눈물 젖은 영화라도 본 날엔, 혹은 햇살 맑은 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 온종일 마음에 여운이 남는다. 그 여운이 누구를 가르키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저 멀리서 한 독자분이 여행 가시는 길에 안동에 잠깐 들렸다며 가게를 찾아주셨다. 경기도에서 도서관을 운영하시며 강연도 하신다고. 가게도 한산 할 때라 3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내 책을 얼마나 자세히 읽으셨는지, 작은 소재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자연스레 이야기 주제는 그쪽으로 모아졌고, 나는 말씀을 들으며 동시에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됐다.
지금도 견디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마음이 아파서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염증, 그러니까 염세적인 생각 따위들이 자꾸 들어서다. 그러다보면 근원적인 물음에 다다른다. 대체 왜 사는걸까, 하는.
꼭 쇼펜하우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는게 매일 똑같잖아. 애 있는 사람들은 대체 애를 어디까지 성공시키려고 하는지 종일 애만 바라보고, 돈 있는 사람들은 종일 골프를 치고, 궁핍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 겨를도 없이 뙤악볕 아래 종일 일만 하고.
부자도 가난한 이도, 도둑놈도 경찰도, 성직자도 무신론자도, 숨은 변수 따위는 찾을 필요도 없이 한 평생의 삶이 너무 뻔한데. 이럴 바엔 뭐하러 사는걸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스펙타클 한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나누는 찰나의 순간들을 뺀다면 남는 건 뭐가 있을까.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아인슈타인은 삶이 가치 있었다고 여겼을까. 셰익스피어는? 태양왕 루이14세는 어땠을까.
어떤 어른들은 또 “사는게 다 그렇단다” 하면서 무지몽매 한 말로 우리들을 안도의 길로 가스라이팅을 한다. 1,000년전에도 했을 법한 뻔한 말.
차라리 견디기 힘든 날엔 나빴던 것들만 생각하며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빼내면 좋은 마음이 들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은 금방 잊어도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결코 잊지 못한다.'
나는 올 여름 아버지 납골당을 한번도 찾질 않았다. 그리고 고백컨데 생각도 한번도 나질 않았다. 10년간 매일 아침 눈뜨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으로 시작했던 아침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잊혀져 간다. 나에게 잊는 건 기적이 아니었던 셈이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젠.
한가지 소원할 수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벗 하나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 산길을 더듬어 불쑥 찾아오는 벗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열어 둔 채 잠이 드는 거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벗이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