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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Dec 11. 2023

천년의 도시 페스에 도착했는데 돈이 없다니

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15화)

마라케시를 떠나기 전 한 군데 꼭 볼 곳이 있었다. 바로 마조렐 정원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숙소인 리아드에서 나왔다. 제마알프나 광장으로 나오자마자 몇 명의 택시 기사가 한꺼번에 다가오더니 호객을 한다. 10분 정도 걸리는 마조렐 정원까지 100 디르함을 불렀지만 마라케시에 머문 지 벌써 4일 차, 우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30 디르함에 합의를 보고 택시를 탔다.



마조렐 정원 앞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시간대 별로 입장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미리 예매해 둔 입장권으로 아침 8시에 입장했다. 호기심 가득 안고 마조렐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길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초록잎 무성한 나무들은 마치 밀림이 연상될 정도로 커다랗고 빼곡했다.



야자수는 물론 선인장도 키가 엄청 컸다. 곳곳에 아름다운 분수가 물을 뿜고 있고 건물들은 온통 파란색 빛을 띠고 있다. 파란색은 매우 강렬했고 신비로웠다. 온통 파란 세상에서도 걷다 보면 군데군데 노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창문과 화분들이 보인다. 노란색은 마치 파랑의 변주인 듯 상큼할뿐더러 지루할 틈을 안 준다. 길을 따라 벤치들이 놓여 있다. 잠시 앉았는데 그만 파란색에 흠뻑 취해 버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파란색이 있다니, 그저 경이로웠다.



강렬한 파랑의 정원 


            

▲  마조렐 정원. 초록과 파랑의 조화가 아름다운 통로

ⓒ 김연순



마조렐 정원은 모로코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을 때 프랑스의 화가 자크 마조렐이 평생 동안 일군 정원이다. 아라비아 특유의 파란색을 사랑한 자크 마조렐은 정원 곳곳에 파란색 건물을 배치해 두었고 바로 이 파란색이 마조렐 색깔로 불리고 있다.



그의 사후, 황폐해진 이곳을 알제리 태생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사들였고,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이곳에 머물며 정원을 복원했다고 한다. 마조렐 정원 한편에 이브 생 로랑 박물관이 있는 이유다. 강렬하고도 신비스러운 파란색의 마조렐 정원, 붉은색의 마라케시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마라케시를 여행하는 분들은 꼭 가보시길 권한다.


            

▲  마조렐 정원의 분수

ⓒ 김연순



현금 없는데 인출도 안 되는 상황  



 


4일간의 마라케시 여행을 마치고 페스로 향했다. 마라케시 공항에서 한 시간 걸려 페스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여행 다큐를 통해 자주 소개될 정도로 페스는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웬걸, 여기가 내가 아는 그 페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공항 규모가 매우 작았다. 어리둥절한 채 짐을 찾은 후, 공항의 현금지급기에서 현금을 찾기로 했다. 마라케시에서 머물며 현금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트레블월랫 카드를 넣고 유로화를 찾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불가능했다. 공항의 안내소에 물었더니 공항 현금지급기에서 유로화는 지급이 안되고 오로지 모로코 화폐인 디르함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황스러웠고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공항 밖으로 나왔다. 공항 밖은 건물도 별로 안 보이는, 마치 황량한 들판 같았다. 공항이면 택시 정류장이 줄지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가야 택시를 타는 곳이 있었다. 그것도 정식 택시가 아니라 자가용을 가지고 택시 영업을 하는 차들이었다.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며 흥정을 하는데 우리는 이미 위축되어 있었다. 그가 외치는 150 디르함에 남아 있는 현금을 확인해 보았다. 간신히 맞출 수 있었고 깎지도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짐을 실었다.


            

▲  블루게이트. 페스의 메디나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문은 파란색, 나오는 문은 녹색이다.

ⓒ 김연순



천년고도 페스에는 마라케시의 메디나 못지않게 오래된 메디나가 있다. 이 메디나에 9천 여개의 골목이 있어 한번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다는 얘기를 안내 책자에서 읽었다. 1박 2일밖에 머물지 못하는 페스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검색해 드디어 한국인 가이드를 찾았고 그분과 연락이 닿았다. 숙소도 가이드가 소개한 한국인 민박집으로 정했다. 얼마 만에 보는 한국인인가, 기대를 잔뜩 하고 택시에서 내려 민박집으로 들어섰다. 페스에 산 지 9년쯤 되었다는 70대 여성이 주인이다.



한국말로 이야기 나누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저런 안내를 받았고 현금이 없는 상황도 전했다. 근처의 은행을 알려 주셨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서 은행을 들러 돈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은행의 현금지급기가 안된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네 은행 현금지급기에서도 유로화는 찾을 수가 없는 거다.



모로코 국내에서는 모로코 돈밖에 인출할 수 없다는 걸 미처 몰랐다. 우리가 가진 월랫 카드에서는 유로화로만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줄 알았으면 모로코 오기 전에 미리 현금을 찾아둘 걸 그랬다.



고민 끝에 발견한 방법 


            

▲  좁은 시장 골목을 누비는 당나귀. 등에 짐을 실어 나르고 있다.

ⓒ 김연순



후회가 밀려왔지만 몰랐던 걸 어쩌랴. 남편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고 점차 말을 잃었다. 뭘 물어도 대답을 안 했다. 한참을 생각하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숙소로 돌아가 주인에게 인터넷 뱅킹으로 환전수수료를 포함한 돈을 보내주고 모로코 돈을 받기로 했다. 제안하니 민박집주인도 흔쾌히 응해 주셨다. 현금을 받아 들고 나오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호기롭게 택시를 타고 페스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블루게이트로 향했다. 블루게이트 앞은 현지인뿐 아니라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에게 밀려 메디나로 들어섰다. 잠시 구경하는데 중식당을 발견했다. 밥이 몹시도 그리웠던 차라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볶음밥과 볶음면, 그리고 토마토 계란 수프를 주문했다. 배가 고파 그런지 다 맛있었지만 뜨끈한 토마토 계란 수프가 들어가니 속이 다 뜨끈해지면서 마치 하루를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배를 채웠는데 이상하게도 기운이 나기는커녕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블루게이트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고 싶었다. 카페들이 많았지만 모두 만석, 빈자리는 없다. 조금 기다리다 빈자리가 보이는 한 노천카페로 들어갔다. 주문한 민트 티가 입 안에서 화사하고 향긋한 향을 터뜨렸다.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블루게이트를 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외관의 색이 파란색이 아니고 초록색이다. 들어갈 때는 분명 파란색이었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메디나로 들어가는 문의 외관은 파란색, 메디나에서 밖으로 나오는 문의 외관은 초록색이다.


            

▲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조하는 모습

ⓒ 김연순



다음날 아침 숙소 앞으로 나가니 한국인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안내로 페스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메디나 초입에 주차를 했다. 일일 투어, 이제부터는 내리 걷는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모로코 현지인 가이드도 함께 동행했다. 사람 많은 비좁은 골목을 누비며 온갖 상점들과 시장들을 둘러보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빵 굽는 집도 보고 갓 구운 빵도 얻었다. 직접 직조하는 작업공간도 보았는데 직조의 결과물인 수공예 작품, 형형색색의 천과 머플러, 카펫들이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몇 개의 소품을 사서 들고 나왔다. 이슬람 성전인 모스크와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곳도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드디어 한국 TV에서도 많이 소개된 테너리에 갔다. 페스가 한국에서 유명한 건 테너리 때문이다. 테너리는 천연 가죽 염색 작업장인데, 사실 난 테너리 방문을 망설였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 염색을 한다는데 자꾸 죽은 동물이 떠올라 좀 괴로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번 가보기로 했다. 테너리 입구에 들어서자 가게에 있던 사람이 민트 잎을 내민다. 가죽을 염색하는 냄새가 지독하니 이 민트 잎을 계속 코에 대고 중화시키라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의 냄새는 지독했고 우리는 민트 잎을 코에 바짝 댄 채로 다녔다.


            

▲  페스의 명물 천연 가죽 염색 작업장인 테너리.

ⓒ 김연순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가 그만 뒤로 자빠질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제된 소의 머리가 걸려 있는 거다. 또다시 심장은 쪼그라들다가 쿵쾅쿵쾅 널을 뛰었다. 남편의 팔을 부여잡고 간신히 옥상에 올랐다. TV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엄청나게 큰 색색의 염색 단지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며 가죽을 넣고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각양각색의 염색 단지들이 장관이다.



나는 동물의 털을 이용한 옷, 그리고 가죽 옷을 입지 않는다. 가죽 가방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가죽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어쩌다 한 번씩 신는 구두는 가죽이다. 이후 가죽을 구매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그만 가죽 슬리퍼를 사 버렸다. 모로코의 전통 신발 바부슈, 기념으로 한 개쯤은 괜찮겠지 하면서 마음에 쏙 들어오는 예쁜 색깔의 슬리퍼를 골랐다. 그리고 지금 그 슬리퍼는 방바닥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대신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현금 없이 도착한 페스, 1박 2일의 여정을 마치고 이제 셰프샤우엔으로 간다. 


▲  페스의 오래된 빵 굽는 가게ⓒ 김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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