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16화)
페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걸려 셰프샤우엔에 도착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도착한 셰프샤우엔은 모로코 내륙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깜깜한 밤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갔다. 체크인을 하는데, 호텔 측에선 예약이 안되어 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확인해도 그렇다. 이럴 수가.
지금껏 다녀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예약 사이트의 실수인 것 같다. 좀 당황이 되었다. 구글 번역기로 서로 상황을 확인해 가며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호텔 측에선 다행히 빈방이 있다고 한다. 현금으로 다시 결제했다. 예약 사이트엔 추후 환불받기로 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섰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풀렸다. 방이 아주 깔끔하고 훌륭하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은 7층 루프탑에서 먹게 되어 있다. 평온을 만끽하며 여유를 갖고 천천히 아침식사를 즐겼다. 갖구운 빵과 스크램블, 신선한 채소와 여러 과일 주스를 먹으니 비타민까지 보충되는 듯싶었다. 계단이 보여 한 층을 더 올라가 보았다. 탁 트인 사방이 눈에 들어온다.
▲ '두개의 뿔'을 상징하는 셰프샤우엔 마을 전경
ⓒ 김연순
커피를 한잔씩 가지고 올라와 등받이 넓은 쿠션에 앉았다. 다리도 있는 힘껏 뻗어 보았다. 세상 편한 자세로 커피 향을 맡으며 사방을 둘러보는데 마을 전체가 온통 파란색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셰프샤우엔 온 마을이 파란색이다.
염소 뿔 같은 산의 모습
셰프샤우엔(Chefchaouen)이란 이름은 이 마을 뒷산의 모습에서 유래한다. 마을 뒤편으로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염소의 두 뿔(chouoa)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단다. 쉐프샤우엔을 그대로 해석하면 '뿔을 보아라'라는 뜻이다.
15세기 무렵, 스페인 그라나다에 살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가톨릭 세력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의 산골짜기 셰프샤우엔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 갔는데 집의 벽은 모두 흰색을 칠하고 창문과 문은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칠했다. 또한 마을 곳곳에는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
▲ 셰프샤우엔 골목
ⓒ 김연순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 유대인이 대거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히틀러의 학살을 피해 이주해 온 것이다.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셰프샤우엔은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기에서 알 수 있듯 파란색은 유대인의 상징색이다. 셰프샤우엔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을 파란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마을은 온통 파란색 마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유대인들은 이 마을에서 떠났지만 남은 원주민들은 파란색 마을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파란색이 뜨거운 기온을 낮추게 할뿐더러 모기를 쫓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파란색 마을로 유명해지며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셰프샤우엔은 이제 마을의 집들 뿐 아니라 골목길 바닥까지도 모두 파란색이다. 색이 바래지면 또 파란색으로 칠하고 정기적으로 덧칠하며 파란색 마을을 유지해가고 있다.
▲ 셰프샤우엔 골목길에 그려진 벽화
ⓒ 김연순
셰프샤우엔의 골목길엔 온갖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들이 가득하다. 페스에서 직조 현장을 본 후라서 그런지 천 한 장 한 장이 모두 귀하게 여겨졌다. 물품 하나하나에 그 분야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며 왠지 뭉클했다. 그 귀한 물건들이 신비의 색 파란색 상점들 내부와 벽에 걸려 있다. 원색의 주황빛 카펫, 붉은빛 머플러들은 상점의 파란색과 대비가 돋보여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다니다 보면 파란색 벽과 골목길 바닥에 다양한 그림도 그려져 있고 글씨도 쓰여 있다. 그저 길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볼거리가 많아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다.
걷다 보니 메디나(구 도심) 광장이 나온다. 셰프샤우엔의 메디나는 마라케시나 페스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다. 메디나 광장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고, 나무를 둘러싸고 벤치들이 있다. 광장 주변으로는 식당과 카페, 상점들이 있다. 광장에는 식당이든 카페든 자기 가게로 오게 하려는 직원들의 호객이 엄청나다. 영어로, 불어로 "어서 들어오라, 음식이 맛있다"라고 한다.
▲ 셰프샤우엔 마을을 칠하는 원색의 염료들
ⓒ 김연순
조금 기웃기웃하다가 못 이기는 척, 한 직원의 호객에 응했다. 직원의 아주 신이 났다. 카페로 들어가 크레페와 시원한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해가 쨍쨍한 낮시간에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더웠고 목이 말랐다. 아이스티가 한층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행지에선 서로가 서로의 배경
카페에 앉아 광장의 지나는 사람들을 넋 놓고 구경했다. 히잡을 둘러쓴 무슬림 여성들, 뾰족한 모자가 달린 모로코 전통 의상 질레바를 입은 남성들, 다양한 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행객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 분장을 한 사람도 있는데, 그는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사진을 찍어 주고 돈을 받는다.
▲ 셰프샤우엔 골목길
ⓒ 김연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얼핏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를 구경하고 있다.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 서로가 서로의 관심이 되는 걸 보니 역시 여행지인가 보다. 호기심 어린 따뜻한 시선이 관심으로 느껴진다.
광장 한 편에서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찬찬히 살펴보니 헤나 타투를 하는 사람들이 다. 히잡을 쓴 중년의 여성이 앞에 앉은 여성의 팔에 헤나 타투를 해주고 있다. 인기가 많은지 그 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순간, 갑자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한 열망이 올라왔다. '나도 타투해보고 싶다.' 이 강한 열망은 망설임을 눌렀다. 평소 손톱에 매니큐어 한번 안 해본 나는 한국에서는 못했지만 여행지 모로코에서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 앞으로 가 차례를 기다렸고 마침내 자리 잡고 앉았다. 샘플이 그려진 종이를 몇 장 보여주며 원하는 문양을 고르란다. 몇 장을 뒤적이며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문양을 골랐다. "이걸로 해 주세요." 헤나 타투이스트는 씩 웃으며 "잘 골랐다"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염료가 든 주사 바늘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아프냐고 물었다. 안 아프단다.
▲ 겁을 잔뜩 먹은 헤나 타투
ⓒ 김연순
그래도 잔뜩 긴장한 채 살짝 팔목을 내밀었다. 드디어 타투이스트가 주사 바늘을 누르자 짙은 밤색 염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팔목에 그림이 그려지는데 아뿔싸, 겁먹은 게 무색하게도 하나도 안 아프다. 바늘로 찌르는 게 아니라 바늘구멍을 통해 나온 염료가 피부에 그려지는 거다. 괜히 겁먹었다. 민망하다. 그려진 문양은 잠시 후에 굳으며 그것 자체가 타투가 된다. 헤나 타투가 그런 건가 보다.
마치고 나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나 타투한 여자야'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그 후로 일주일 정도 지나자 타투 문양은 없어졌다. 아쉬웠지만 그 잠깐의 경험이 내겐 신선했고 행복감을 주었다. 안 해보던 것 해보기, 앞으로도 남은 인생 동안 그래 보려고 한다.
다시 골목을 누볐다. 걸어도 걸어도 구경할 게 많다. 골목에서 소년들을 만났다. 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공을 보니 또 못 참고 공을 넘겨받아 살살 드리블을 했다. 발목 부상 후유증을 어쩔 거냐며 남편이 만류해 멈췄다. 잠깐이지만 재밌었다.
골목에는 다니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슬람에서 우대받는 동물, 고양이도 많았다. 골목 상점에서 파는 가방들 사이에서도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다니고 있다. 가방 뒤로도 들어갔다 나왔다 이리저리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한국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 모로코에선 당연한 일이다.
계속 다니다 보니 햇빛은 뜨거웠고 목은 말랐다. 골목 한편에서 오렌지 주스를 즉석에서 갈아주는 카페가 보인다. 웬만하면 노천카페라 들어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저 보이는 의자에 자리 잡고 앉으면 된다.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남편은 광장을 더 보고 싶어 하길래 가라고 하고 혼자 앉아 여유를 즐겼다.
주스를 마시며 사방을 둘러보니 역시나 파란색 벽에 아라비아 글자가 보인다. 주인에게 무슨 뜻인지 물었다. '판사'라는 뜻이란다. 예전에 이 골목에 법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지금도 그 골목은 '판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여행 책자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또 하나 직접 알아내니 뿌듯하다.
카페 주인이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매우 반가워하며 한국 음악 좋아한단다. 누구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BTS 좋아한단다. 모로코의 작은 마을 셰프샤우엔까지 K-POP이라니, 괜히 으쓱했다.
▲ 셰프샤우엔 알카사바 전경
ⓒ 김연순
좀 쉬다가 일어나 메디나 광장의 한편에 있는 알카사바에 들렀다. 알카사바는 황토색 흙빛이다. 온통 파란색 마을에 황톳빛의 알카사바는 유독 눈에 띄었고 이상하게도 정감이 느껴졌다. 모로코 국기가 걸려 있는 성채로 들어가 좁은 계단을 오르니 전망대에 도착했다. 마을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셰프샤우엔, 두 개의 뾰쪽한 봉우리 아래 파란색 마을, 그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니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넘어 마음이 찡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파란 마을 셰프샤우엔 사람들이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잘 지키며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신비로운 셰프샤우엔을 떠나 이제 탕헤르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