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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Mar 07. 2024

꽃향기 가득한 중세의 골목, 지로나

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24화)

5주 만에 다시 온 바르셀로나에서 7박 8일 머물 예정이라 인근 도시를 다녀보기로 했다. 당일치기로 가능한 곳 중 지로나와 몬세라트를 선택했다(몬세라트 이야기는 다음 호에).



지로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때마침 지로나는 꽃 축제 기간이고 이왕이면 개막하는 날에 맞춰 가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산츠 역으로 가서 고속열차 렌페를 탔다. 40분 만에 지로나 역에 도착했다. 지로나역에서 나오자마자 거리는 꽃 축제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  꽃 축제가 열리는 지로나 거리. 카탈루냐 깃발과 함께 걸린 노란 리본은 카탈루냐의 독립을 상징한다.

ⓒ 김연순



깔끔한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온갖 꽃으로 장식한 부스들이 차례로 보인다. 각 부스마다 주제가 있는지 어떤 부스에서는 물방울 형태의 글자 SOS를 꽃과 함께 꾸며두고 있다. 아마도 지구의 '물 부족'을 상징하는 듯하다.



꽃과 나뭇잎, 여러 가지 풀들을 종이와 함께 장식한 귀여운 느낌의 부스는 어느 초등학교 학생들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선명한 빨간색 제라늄 꽃 위로 까만 벌레 인형, 그리고 너머엔 각종 계열의 푸른색을 칠한 솔방울들이 하나 가득 쌓여 있다. 그것도 한 초등학교 학생들 작품이다. 조금 더 가다 보니 한쪽 나팔꽃처럼 생긴 보라색 꽃과 파란색 수국이 풍성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87번 팀의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모든 부스는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들이 참여해서 재활용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다. 구상하고 칠하고 배치하고 만들었을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는 재미가 꿀맛이다. 보면 볼수록 다음 부스에 기대를 갖게 한다.



꽃 장식 부스 공간이 끝나갈 무렵 강이 나타났다. 온야르 강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멈추어 섰다. 돌로 만들어진 '페드라 다리'다. 강변으로 선명한 색색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온야르 강은 그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다. 잔잔한 강물에 비친 모습을 보니 마치 물의 흐름도, 시간도 멈춘 듯하다. 주변의 소음도 다 잠든 듯 조용한 순간이 찾아왔다. 한 줄기 햇살이 물살에 반짝이는 순간 강물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  온야르강에서 본 '에펠 다리'. 빨간색 철교로 구스타프 에펠이 만들었다.

ⓒ 김연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데, 눈길을 확 잡아끄는 빛깔이 보인다. 정적이 흐르는 화면에 빛이 순간 번쩍이는 느낌이다. 온야르 강을 가로지르는 빨간색 다리, 그 유명한 '에펠 다리'다. 정식 명칭은 'Pont de les Peixateries Velles'인데 흔히 '에펠 다리'로 불린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에펠 탑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에펠이 만들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 다리는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여러 번 나온다. 나도 푹 빠져 본 이 드라마, 그 명소를 걷게 될 줄이야.



  

지로나 신시가지를 걷다 보면 종종 눈에 익은 깃발이 보인다. 주택가 거리에서도 보이고 온야르 강가의 건물들에서도 보인다. 노란색과 빨간색 줄무늬 깃발, 바로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지로나는 카탈루냐 주에 속해 있다. 스페인어로는 헤로나(Gerona)로 부르고 카탈루냐어로는 지로나(Girona)라고 부른다.



바르셀로나가 주도인 카탈루냐 지방은 바스크 지방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성향이 짙다. 수도인 마드리드를 주도로 하는 카스티야 지방과 대립각을 세우며 독립을 염원하고 있는 카탈루냐의 깃발을 보면 왜 내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한 건물의 테라스에서 커다란 노란 리본을 발견했다. 앗, 세월호 리본이 왜 여기에? 깜짝 놀랐다.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노란 리본 역시 카탈루냐 주민들의 독립의 염원을 담은 상징이라고 한다.



작은 광장을 지나는데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큰 인형이 서 있는데 주변에 화사한 꽃들로 가득하다. 형형색색의 인형은 안에 페치코트를 입은 것처럼 둥글고 활짝 펼쳐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모두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  지로나 꽃축제에 전시된 인형. 꽃장식은 모두 뜨개로 만들어졌다.

ⓒ 김연순



아니, 가까이 가 보니 진짜 꽃이 아니라 꽃 모양 뜨개 장식이다. 꽃이 달린 윗 옷도 모두 뜨개질 옷이다. 손목의 레이스도, 심지어 손가락도 모두 뜨개질이다.



압권은 손가락 끝의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인데 거기까지도 모두 뜨개질이라는 거. 저걸 다 떴다고? 저렇게 큰 인형을, 저렇게 디테일하게 누군가 코바늘로 한 땀 한 땀 작업했을 것을 상상하니 입이 안 다물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만들어졌을 결과물에 그저 감탄할 밖에. 그 앞은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한 컷 찍었다. 물론 셀카로. 한국과 달리 여긴 대체로 남한테 찍어달란 말을 잘 안 한다. 거의 다 셀카다.



사람들이 걷는 대로 아니, 사람들에게 밀려 걷다 보니 꽃으로 가득한 계단이 보인다. 대성당은 꽃으로 가득한 계단 끝 저 멀리 있다. 86개로 된 이 계단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지로나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  지로나 대성당 앞 계단. 꽃장식 가득한 대성당 계단은 미국 드라마 [왕자의 게임] 촬영지이기도 하다.

ⓒ 김연순



스페인의 성당은 대부분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건축하느라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걸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다. 성당 내부에도 꽃 장식이 여기저기 가득했기 때문이다. 바닥 곳곳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림들. 이게 모두 꽃 축제의 작품이다. 


             

▲  지로나 대성당 내부의 꽃 장식1

ⓒ 김연순



색색의 꽃과 나뭇잎, 풀과 돌 같은 자연물로 만들어진 이 장식물들은 선명하고 동시에 디테일하다. 얼핏 보아 그림으로 보이는 이 꽃 장식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정신을 놓고 한참 동안 빠져 들었다. 성당의 긴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에 노란 색감의 천장화가 눈에 들어온다. 회색빛 벽과 함께 뭔가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  지로나 대성당에 내부에 전시된 꽃 장식2

ⓒ 김연순




             

▲  지로나 대성당에 내부에 전시된 꽃 장식3

ⓒ 김연순



성당을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보이는 곳마다 중세의 거리다. 오랜 역사를 담아 켜켜이 시간을 포개두고 있는 돌계단, 돌 벽, 돌바닥을 걸으며 오르며 만지며 스치며 중세의 시간을 마음에 담았다. 현재로부터 완벽히 고립된 고즈넉한 이 시간이 좋다. 한참을 돌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회색빛 좁은 길을 지나다 보면 간혹 건물의 창문에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 각양각색의 화사한 꽃 화분들이 걸려 있다. 중세의 시간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광장에도 골목에도 꽃이다. 지도를 보며 명소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꽃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다녔다. 우리가 지나온 어느 골목은 영화 <향수>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갑자기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사방이 둘러 쌓인 광장 가운데는 말을 탄 사람의 동상이 있다. 광장의 이름은 '독립광장'이다. 공연이 있는지 한쪽에 마련된 무대가 웅성웅성하다. 남편과 나는 무대가 잘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이왕이면 지로나 맥주지 하면서.


             

▲  지로나 독립광장의 한 카페에서 마신 지로나 맥주

ⓒ 김연순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정식 무대 공연 전 아카펠라 팀이 연습 중이다. 아카펠라 소리 듣는데 청량함이 솟구치는 것 같다. 시원한 지로나 맥주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청량감을 배가시킨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지로나를 떠올리면 거리 가득한 꽃향기와 더불어 목을 타고 넘어가던 맥주의 청량감에 입맛을 다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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