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8화)
2023년 4월부터 42일 동안 스페인(바르셀로나, 산세바스티안, 빌바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포르투갈(포루투, 리스본), 모로코(마라케시, 페스, 쉐프샤우엔, 탕헤르)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 공유합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몇 개의 줄로 길게 늘어서 있다. 렐루 서점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다. 렐루 서점에 가려면 예약이 필수다. 다음날 오전 10시30분으로 예약해 두었다. 시간에 맞춰 서점 앞으로 갔더니 30분 단위로 예약 표지판이 있다. 줄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 사람들도 꽤 있다. 입장료 5유로씩 내고 들어갔다.
▲ 2층에서 내려다 본 렐루 서점. 인상적인 붉은색 나선형 계단
ⓒ 김연순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 가득한 틈으로 나선형 중앙 계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왔다. 전체 내부 구조는 나무로 되어 있고 독특하게도 천장에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나무 계단과 벽체, 천장과 난간에 새겨진 유려한 장식은 섬세하고도 화려하다. 나선형 계단의 바닥은 온통 붉은빛이다. 계단 하나하나를 천천히 오르는데 마치 오래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렐루 서점은 1906년 렐루 형제에 의해 시작된 곳이다. <해리포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 덕분에 유명해졌다. 포르투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던 조앤 롤링은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호그와트 마법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이미지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1층과 2층 구석구석 다니다 보니 익히 들어본 작가들의 코너와 작품들이 있다. 오래된 작가들의 유명한 책들을 만져보며 과거로 시간여행 하는 느낌이었다. 포루투갈어로 된 <어린왕자>가 보여 한 권 사서 나왔다. 책을 살 때, 입장료 낸 티켓을 보여주면 5유로를 제외하고 책 값을 계산해준다.
포르투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약간의 언덕을 올라야 했다. 대성당의 광장에 도착하니 청동 기마상이 보인다. 포르투갈의 '항해왕'이라 불리는 엔히크 왕자를 기리는 동상이다.
엔히크 왕자는 어릴 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으며 항해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배를 만드는 기술과 지도를 제작하는데 관심이 컸고 이를 바탕으로 포르투갈 항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 포르투 대성당. 오랜 역사의 성당 광장 한켠에 노예와 죄인을 묶어 벌 주는 기둥이 있다.
ⓒ 김연순
엔히크 왕자 기마상 근처에 독특한 모양의 길다란 기둥이 있다. '페로우리뇨'로 불리는 기둥의 정교한 문양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기둥의 쓰임이 놀랍다. 죄인과 노예를 묶어 두고 채찍질하며 체벌하는 용도였단다.
아름다운 생김새와 달리 끔찍한 쓰임새였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페로우리뇨'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기단 아래 예닐곱 개의 계단이 있고 계단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나도 그들처럼 계단에 앉았다. 등 뒤로 따스한 햇빛이 느껴지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광장 가장자리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포르투 구시가지다. 건물의 지붕들이 모두 주황색이다. 지붕 색깔 하나 맞췄을 뿐인데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다. 고풍스럽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포르투 대성당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번의 추가 공사를 거치게 된다. 현재의 대성당은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대성당의 외벽엔 오랜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듯 돌이끼가 잔뜩 끼어 있다. 벽 사이사이에도 기둥 군데군데에도 초록빛 이끼가 가득하다. 깔끔하고 정돈된 아름다움도 좋지만 이렇게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에도 마음이 많이 간다.
▲ 대구 요리인 바칼라우밥. 포르투갈의 대표적 음식
ⓒ 김연순
점심으로 피시 스프와 바칼라우밥, 그리고 리조또를 시켰다. 피시 스프는 뜨끈하며 칼칼했고 마침 인후통에 살짝 고생하던 남편은 대만족이었다. 바칼라우는 생선인 대구를 말한다. 찐 대구를 밥과 채소와 함께 볶은 요리인데 맛도 모양도 좋았다. 리조또는 너무 짜서 결국 조금 먹다 말았다.
안내 책자에 스페인도 그렇지만 포르투갈도 음식이 대체로 짜게 나오니, 주문하기 전에 "짜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문구를 읽었는데 그만 까먹었다. 리조또가 특히 짠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문 전에 했어야 하는 말을 한 숟갈 뜨고서야 생각이 난다. 대체 여행 마치기 전까지 할 수는 있으려나 싶었다.
상 벤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제스틱 카페가 있다. 카페까지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가는 동안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곳곳에서 버스킹이 펼쳐지고 있다.
카페 바로 앞에서도 한 여성이 버스킹을 하고 있는데 둘러 서서 듣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도 멈춰 그 소리에 빠져들었다. 악기 케이스에 동전을 넣어주고 드디어 마제스틱 카페로 들어갔다.
▲ 1921년 문을 연 마제스틱 카페. 백년 된 카페답게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 김연순
높은 천정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바로 보인다. 흰색 대리석 상판의 앤티크 테이블과 가죽의자, 벽면의 거울이 고풍스럽다. 카페 직원들이 입고 있는 금빛 견장이 달린 흰색 유니폼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마제스틱 카페는 1921년 문을 열었다. 서빙하는 직원들 중에는 나이든 사람들도 있다. 역사가 오래된 카페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서빙하는 모습이 유달리 좋아 보인다. 나도 나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내가 사는 제주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줄레주'라는 카페가 있다.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집이다. 여느 집 보다 맛이 좋아 종종 가곤 한다.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원조 포르투갈에 왔으니 기회되는 대로 먹어 보기로 했다.
▲ 에그타르트. 마제스틱 카페의 에그타르트는 얼그레이 티와도 잘 어울린다.
ⓒ 김연순
마제스틱 카페에서 에그타르트와 얼그레이를 주문했다. 기대한대로 에그타르트는 향긋하고 달달하면서 부드러웠다. 시나몬 가루 듬뿍 뿌려 천천히 음미하며 베어 먹었다. 흰색 도자기 주전자에서 티를 따라 마시는데 따뜻한 얼그레이 차가 몸도 마음도 차분하게 해주는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다 저녁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숙소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포르투갈 전통음식 '프란세지냐'가 있다. 궁금했던 차에 냉큼 두 개를 주문했다. 재료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얼핏 외관만 보고 시켰는데 고기를 안 먹는 내겐 실패였다.
▲ 프랑스의 크로무슈에서 유래된 포르투갈의 전통음식 프란세지냐
ⓒ 김연순
버거처럼 생겼길래 새우 버거나 피쉬 버거가 가능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식빵 안에 고기와 햄, 소시지를 넣고 치즈로 두른 후 소스를 듬뿍 뿌린 채 나온 음식, 이게 프란세지냐다. 이름에서 연상되듯 프랑스의 샌드위치 크로무슈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음식이 나왔는데 '칼로리 폭탄'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잘 먹는 남편이 프란세지냐를 두어 번 베어 먹다가 포기했다. 너무 느끼하단다. 버섯 요리를 추가 주문해 먹었고 내 몫으로 나온 손도 안 댄 프란세지냐는 포장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불 꺼진 상가 앞에 자리를 깔고 앉은 노숙인이 보였다. 새 음식이니 따뜻할 때 그 분에게 드리자고 했더니 남편은 골목을 더 돌자며 자꾸 만류한다. 나는 음식이 따뜻할 때 전하고 싶었는데 망설이는 남편이 이해가 안 되었다.
닦달하며 캐물으니 노숙인이 혹시 자존심 상할까 싶어 망설인단다. 결국 내가 다가가 조심스레 프란세지냐를 건네며 혹시 드시겠는지 물었다. 그분은 고맙다며 선뜻 받았다. 잘 받아주어 고마웠고 식지 않아 다행이었다. 포르투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