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요란스러운데 끈기가 없어서 흐지부지 끝내버리거나 빨리 포기하는 내가 용두사미 그 자체라며 오빠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엄마는 뭐든지 3년은 해봐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몰입하고 집중해서 경험해 본 후 계속 열심히 할지, 되는대로 대충 할지, 그만할지 나만의 촉과 기준으로 빠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맞지 않는 것을 계속하는 것은 시간과 열정의 낭비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엄마에게 혼나는 건 매우 억울했지만 '아~ 그때 잘해볼걸', '다시 하면 잘할 자신 있는데' 이런 후회나 미련은 많지 않다. 그리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안 시켜주거나 하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하고야 마는 마이웨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내가 요즘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아하는 일이 생겼는데 바로 '민화(民畵)'를 그리는 것이다.
사연 많은 종이에 그린 나의 첫 그림 <모란도>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엄마의 유전자로 인생 초반은 음악으로 살았고, 중국이 대세라며 중국으로 무작정 유학을 보낸 남편의 선택으로 인생의 중반은 중국과 연을 맺고 살았는데, 인생의 후반은 아버지 유전자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며 살게 되는 것은 어떨까?
그림과 공예를 하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재능을 포기하고 사셨던 아버지가 담배를 입에 물고 신문지의 여백에 볼펜으로 꽃을 그리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까다로운 엄마도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은 약도(略圖) 조차도 멋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만나게 된 훌륭한 선생님과의 인연도 어쩌면 아버지가 보내주신 선물일지도 모르니 감사하며 성실함으로 꾸준히 배우고무엇보다 즐겁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고뇌가 가득할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고 하시니 고뇌의 양으로 따지면 적어도 뱀의 머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민화와 함께 할 행복한 날들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