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2)
초2 아이가 하교하며 들어선 어느 오후. - 바쁘니? 하며 걸려 온 아빠의 전화. 다소 뜬금없는 시간대에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빠 노트북을 켜면 자동으로 아빠 이메일로 들어가거든? 근데 여행사에서 엄마한테로 이메일을 보냈다는데, 이 노트북에서 엄마 이메일을 열 수가 없어. 엄마도 모르겠대. 엄마는 글쎄 뭐라는 줄 아니? 이게 아빠 노트북이라서 아빠 이메일만 되는 거라나 뭐라나. 참 나. 이거 어떡하지?”
“아빠 아이디로 자동 로그인이 되어 있네요. 로그아웃하시고, 엄마 아이디로 다시 로그인하시면 돼요.”
그으래? 근데 로그아웃을 어떻게 하더라?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벌써 마흔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내 기준에 우리 엄마, 아빠는 노인이 아니다. 청려장이라도 짚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그 단어가 아직 많이 과하다.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헬스장을 주 4회 나가시고, 배드민턴 클럽 활동을 주말마다 하시며, 실력도 수준급이셔서 대회를 휩쓸어 오실 정도다. 그뿐인가. 유튜브, 스마트워치, 클라우드도 필요한 만큼 다루신다.
게다가 엄마는 또 어떤가. 인스타그램 공구며, 스마트폰으로 장 보시는 건 디폴트 값이고, 매일 영어 회화, 스페인어, 이탈리아어까지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 독학하시는 열정학구파. 코로나 이전부터 나에게 학교를 관두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시간적, 경제적 자유를 누리라고 강하게 조언해 온 급진적 마인드의 소유자 되시겠다.
그런 두 분이 노트북 앞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나누는 비논리적인 대화라니. 심지어 엄마는 20년 동안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셨고(아무리 DOS라도), 학교 홈페이지도 만드셨으면서, 컴퓨터의 0과 1도 모르는 소리를 하시다니.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들은 아이는 – 그냥 로그아웃하면 되는데요? 하고 있고, 나는 이미 한껏 마음이 복잡해진 터라 - 너는 본 투 비 디지털이고, 인마. 하며 속으로 퉁사발을 준다.
클릭 한 번이면 되는 건데,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노인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로그아웃 버튼을 찾아 헤매는 불쌍한 두 늙은 양에게는 당장 영상 통화가 절실하다. 모니터 화면을 보며 직접 위치를 찾아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빠는 문을 열고 나가실 수 있었고, 그 문으로 엄마가 들어오실 수 있었다.
영상 통화 화면 속으로 성공의 기쁨과 머쓱함과 민망함이 뒤섞였다. 서로 얼굴을 들이미시며 투닥투닥거리신다.
“우리 딸, 고마워, 고마워.” (앞으로 제가 더 신경 쓸게요.)
“무슨 로그아웃 버튼이 저렇게 숨어있다니?” (맞다. 인터페이스가 잘못했다. 인정.)
“이게 내 노트북이라서 안 되는 거라고 자기가 이상한 소리 했잖아.” (슬픈 표정은 하지 말아야지.)
애초에 - 아니 왜 이런 걸 모르셨어요? 하지 않은 나를 셀프 칭찬했다. 내가 당황한 것보다 몇 곱절은 더, 내가 마음 아픈 것보다 몇 제곱은 더하실 테니.
불친절도 번역이 되나요?
휴직을 목전에 둔 겨울방학 1주 전. 우연히 어떤 기사를 읽었다. 햄버거를 드시고 싶었던 나이 지긋하신 어머니. 키오스크 주문에 서툴러서 20분 동안 헤매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셨는데, 너무 화나고 억울해서 딸한테 울면서 전화하셨더라는 사연이 담겨있었다. 예열도 없이 감정이입이 된 탓에 교무실에서 오랜만에 티슈를 왕창 뽑았다. 아버지한테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다 한석규가 급발진하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도 오버랩되었다. 갑자기 의협심이라도 불타올랐나 보다. ‘노인을 위한 친절한 디지털 사용설명서 제작’이라는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것들을 찾아, 노인 세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자 매뉴얼을 만들었다. 간단하게는 와이파이 연결하기부터 유튜브 계정 만들기, 키오스크로 커피 주문하기까지. 카드 뉴스로 제작한 아이들도 있었고, 영상을 찍은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업은 번역 수준이라고 했다. 사용설명서의 거의 모든 단어를 바꾸어야 했다고 한다.
80년대생인 나조차도 구글 드라이브 앞에서 쭈그러들 때면, 도태되어 가는 기분에 아찔하다. 앞서가는 황새를 따라잡기 위해 애를 쓰다가 이미 큰 격차가 나버린 걸 확인한 뱁새의 심정이랄까. 아이 책장에 꽂힌 ‘미래가 온다 – 대멸종’에 시선이 머문다. 날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심란하다.
하물며 엄마, 아빠는?
고작 로그아웃 버튼 하나 찾아드리면서 이건 뭐 조폭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땐 못 나가의 정신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 로그인 버튼은 대문짝만하게 활짝 열어놓고, 로그아웃은 단추보다 작은 글씨로 꽁꽁 숨겨놓으면 어르신들은 도대체 이 불친절한 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