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1)
효도를 빙자한 수요미식회
육아휴직을 하고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수요일마다 엄마, 아빠랑 점심 먹기. 이렇게 말하면 다들 내가 대접해 드리는 건 줄 알지만, 사실 엄마가 차려주시는 집밥을 먹으러 친정에 가는 거다. 똥손인 나는 요리를 못하고, 심지어 관심이 없다. 휴직을 하면서 이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해보려 했으나 차라리 김연아가 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접었다. 다 큰 딸의 스트레스를 염려한 엄마는, 수요미식회가 끝나면 밑반찬을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육아의 최종목표는 아이의 독립이라던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 엄마는 아직도 육아 중이다.
혹자는 나를 굉장한 철부지 내지는 불효녀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의 효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엄마는 우리가 함께하는 수요일 점심을 생각하면 언제나 설렌다고 하신다. 아빠도 수요일 점심엔 국도 반찬도 새로 한 거라 더 맛있다고 행복해하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황송한 수요미식회의 별미는 근황 토크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소하게 오가는 대화가 즐겁다. 우리 집 조 부자의 일상도 공유하고, 엄마, 아빠는 궁금한 게 있으면 이날을 기다렸다가 질문하시기도 한다. 때때로 여행 계획을 짜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가족회의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 사연에 십만 원 드립니다
추석 연휴가 막 지난 수요일. 어김없이 수요미식회에 초대되어 갔다. 오늘도 근황 토크가 메인이벤트, 집밥은 거들뿐.
“아빠랑 연휴 때 영화 보러 갔다? ‘밀수’ 보자시더라고.”
성향이 너무 다른 엄마, 아빠가 무언가를 같이 하셨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다. 영화라고는 출산 이후 겨울왕국밖에 모르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를 총출동시켜 리액션을 한다.
“밀수도 괜찮았어요? 이번 추석 연휴 때 마라톤하는 영화 본 사람들 많다고 하던데. 1945 LA인지, 1847 보스톤인지.”
“1947 보스톤.”
한 글자씩 틀리는 건 기본이고, 설단 현상으로 고유 명사들은 잊은 지 오래인 엄마, 아빠가 웬일로 대번에 오류를 바로잡아 주신다. 뿌듯함 장착한 어깨를 들썩이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신다.
“밀수를 보러 갔는데 티켓을 끊어주는 직원이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서 터치하는 걸로 하려고 보니까 밀수는 이미 상영이 끝났더라고. 그냥 시간대 맞는 걸로 찾으니까 ‘거미집’이 있어서 그걸 보기로 했지 뭐.”
오 마이. 연중무휴 항시 대기 중인 딸내미가 손가락 몇 번 까딱까딱하면 상영시간표도 알 수 있고, 티켓 예매도 1분 컷으로 해 드릴 수 있다고요. 그래도 영화관 데이트가 이 시점에서 섭섭하게 종료되지 않은 것이 어디냐.
“그런데 문제는 티켓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상영관이 안 쓰여있는 거야. 그러다가 제목 옆에 ‘2D’라고 돼 있기에 이거다 싶어 2관으로 들어갔지.”
띠로리. 2D는 3D, 4D 할 때 그 2D라고요. 영화관에 안 가본 지 오래돼서 모르겠지만, 왜 무인으로 운영되는가. 한 명씩은 교대근무를 서야 하지 않을까. 키오스크가 어렵고, 상영관을 찾을 수 없는 어르신들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도 없단 말인가. 이 와중에 ‘2D’에 희망을 걸고 2관을 찾아 들어가신 두 분이 장하기까지 하다.
“2관에 들어갔더니 벌써 영화가 시작됐더라고. 분명 시작 시간이 좀 남아있었는데 말이야. 어두컴컴하니 자리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 간간이 비치는 불빛으로 보니 17, 18이어서 쭉쭉 올라가 자리에 앉았어.”
어우, 드디어 착석 완료. 거 영화 한 번 보기 되게 힘들다.
“그래서, ‘거미집’은 재미있으셨어요? 이미 시작한 뒤라 앞에 내용이 많이 잘리셨겠는데.”
“응. 사전 정보도 없이 무작정 보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거미집이 글쎄 마라톤 하는 이야기더라?”
아... 네?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된 나는 폭소를 터뜨렸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엄마, 아빠도 당신들의 완급 조절이 마음에 드셨는지 함께 오랜만에 눈물까지 닦아가며 웃었다.
‘1947 보스톤’.
제목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요약 정리하자면 ‘밀수’를 보러 갔다가 ‘거미집’ 티켓을 끊고 ‘1947 보스톤’을 관람했다는 대환장 서스펜스 스펙터클 서사극.
거미집에 안 들어간 게 다행일 정도로 만족스러운 관람이셨다며, 수요미식회가 끝나도록 딸내미에게 밥풀 튀겨가며 스포일러를 읊어주셨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다?”
대체 이 험난한 여정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 자리가 17, 18이라면서 아빠가 자신 있게 올라가기에 엄마도 따라서 앉았거든? 다 보고 나오면서 진짜 거미집 상영관은 어디였는지 궁금해서 티켓을 다시 봤어. 글쎄 우리 자리가 I7, I8(알파벳 대문자 I)이었던 거 있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I열 7, 8에 아무도 오지 않아 주셔서 고맙다고 자기 전에 거듭 감사기도를 올렸다. 아멘. 그리고 진짜 거미집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이쯤 되면 납량특집 감이다. 티켓 정보 해석에도 고급 문해력이 필요한가. 우리 아빠는 국어선생님 하시다가 교장으로 정년 퇴임까지 하셨는데?
“자, 이제 네가 잘 정리해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봐.”
어디 십만 원급 사연에 도전장을 내볼까나.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