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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Apr 04. 2024

병정을갑

광고주일 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6

“오 CD 하세요? 잘 되었네요. 진작에 하시지 그랬어요“


광고주 생활을 정리하고 광고 대행사에서 일한 지 3년 차 즈음, 운 좋게 대한민국광고대상을 타게 되었다. 

시상식 곳곳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대부분 광고주일 때 파트너로 일했던 대행사 분들이었다. 

펜타클에서 CD로 일한다고 하자, 몇몇이 '진작에 하셨으면 좋았겠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덕담 차 건넨 말이었으나 나에겐 천천히 곱씹게 되는 말이었다.


고백하자면 광고주 시절,

나는 종종 광고대행사가 갖고 오는 아이디어에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것을 넘어, 직접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카피를 바꾸거나 직접 쓰기도 한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촬영 현장에선 감독의 연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적극적인 디렉션을 주는 광고주였다.

대행사나 PD나 감독이 내 생각만큼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과 의견의 표출이 결국 대행사나 프로덕션을 도와 일을 잘 되도록 만든다고 믿었다.


그땐 몰랐다. 

광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광고주, 대행사, 프로덕션, 편집, 녹음등의 전문 영역이 존재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서로의 일을 존중해 주는 것이 어쩌면 눈앞의 불만을 해결하는 일 보다 더 큰 방향에서 일이 잘 되게 만드는 것을 몰랐다. 

좋은 결과를 만든다고 믿었던 나의 의견이나 대행사 대한 아쉬움의 표현, 질책들이 생각보다 큰 부정적 파급을 갖는다는 사실도 그땐 잘 알지 못했다.

광고주의 지위는 생각보다 막강하다. 대부분의 광고주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광고주의 지위를 이용하자면 끝이 없고 그런 부류의 인간들도 많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인정될 만한 갑질이 아니어도, 광고주의 작은 말과 행동들에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에겐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상처가 결국 다시 부정적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 역시 그땐 알지 못했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갑일 때는 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을이 되니 정이 보였다.

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갑을 경험하니, 정을 존중하는 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광고주일 때는 촬영 현장에서 감나라 배나라 하던 나는 CD가 되면서 감독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결국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흠에 대한 지적을 참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면 그들이 나를 위해 해당 영역의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PD보다 나은 프로듀싱 능력이 없다. 감독만큼의 연출능력도 없으며 편집 역량은 물론 음악적 소양도 부족하다. 전문가 앞에서 의견을 낼 수 있으나 의견이 강도가 세면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촬영 사전 단계에서 약속된 PPM(사전 제작 미팅)을 마치고 나면 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을 벗어나 전문가들이 책임을 지고 일을 완수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영역에 나의 의견이 강해지면 전문가들은 그저 나의 뒤에 숨은 꼭두각시가 되며, 책임을 지지 않고 시킨 일만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자꾸 배우는 게 많아지는 게 부끄럽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크리실 팀장에게 넋두리를 했다. 

광고주일 때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될 때마다 계속 부끄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 광고주로 돌아갈 일은 없으니 혹여 후배들이 광고주가 된다면 일러 주고 싶다. 


광고주 자신이 광고대행사를 뛰어넘는 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역량이 있다면 스스로 하면 된다. 

대행사의 전문 역량을 쓰고자 결정했다면 그들을 믿어줘야 한다. 

누구에게나 실수와 흠이 있다. 당연히 광고대행사도 완벽하지 못하다. 하지만 광고주를 대신해 전문가로서의 역량으로 자신을 도와주게 만들려면 그들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럼 그들이 인정받은 만큼 일하게 된다. 


돈을 준다는 알량한 생각 하나 때문에 광고주가 대행사에게, 대행사가 프로덕션에게, 프로덕션이 감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광고주는 누구보다 제품과 서비스를 잘 아는 전문가이며, 대행사는 광고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과 크리에이티브를 제안하는 전문가이고, 프로덕션과 감독, 포스트 프로덕션은 광고를 제작하는 전문가다. 

갑-을-병-정은 수직관계가 아니며 수평적인 전문가 집단으로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정이 병에게, 병이 을에게, 을이 갑에게 진심을 다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늦게라도 갑이 을이 되어서야 깨달음을 얻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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