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전 직장의 디지털마케팅팀에선 유튜브에 틀 영상 하나 만드는 일조차 매우 힘든 일이었다. TV광고를 찍을 때 곁다리로 유튜브에 틀 클립 영상을 구걸해야 했고, 고작 3000만 원짜리 영상을 찍는데 수많은 보고를 통과해야 했다. 후배들은 상상이 안 가겠지만 TV광고에는 월 3~40억을 우습게 쓰면서 디지털엔 왜 광고를 해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 십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은 왜 TV광고를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광고회사 문을 두드리던 대학 시절엔 대부분의 광고제를 신문사에서 주최했다. 1990년대엔 TV광고 못지않게 신문광고의 파워가 있었고 인쇄 광고가 크리에이티브의 정수를 담는 매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기억에 남을 한 줄의 카피와 절묘한 아트를 담은 멋진 인쇄 광고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기발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15초의 미학으로 담아내 보고 싶어서 광고업으로 다가갔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두 아는 것처럼 시대가 변했다. TV광고를 찍어달라고 하는 광고주가 줄어들고 있다. 영상 광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광고주들 역시 TV가 아닌 유튜브나 소셜미디어에 온에어할 숏폼 광고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인쇄광고는 말할 것도 없다.
여전히 광고업은 창의성이 필요한 직업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대학시절의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광고업에 일하고 싶은 후배들은 줄어들 것이다.
현업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비자의 구매행태, 광고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2024년 WPP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광고주의 요구는 10년 사이 엄청나게 변화했다. 대부분의 광고대행사가 주력하는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이 10년 전 60%에서 20%로 줄었고 퍼포먼스 마케팅이나 커머스, CX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우리가 해오던 일, 잘한다고 믿었던 창의적인 광고 캠페인의 수요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맥킨지, BCG 같은 컨설팅회사들이 AI로 인해 망해가고 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2000대 초반, 마케팅 컨설턴트들은 억대를 넘어가는 연봉에 브레인들만이 모여 있다는 이미지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AI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있다. 최고의 컨설팅 회사들이 곧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의 업은 어떻게 될까? 휴대폰이 사라지고 메타의 레이벤 안경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사람들이 안경 속의 AI에게 모든 답을 듣게 되는 시대가 오면 광고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어떻게든 광고는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만을 갖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존의 광고에 대한 생각을 점검할 필요가 커졌다.
신문광고를 만드는 일이 점차 사라지고, TV광고를 만드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는 변화를 무시하면 안 된다.
결국 수요가 공급을 결정짓는 것이 비즈니스의 본질이다. 광고주의 크리에이티브 캠페인 수요가 왜 줄었는지를 이해해야 우리의 대응도 가능해진다.
소비자의 구매행태는 탐색과 평가가 강화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이 브랜드나 제품의 인지와 구매 고려를 높일 수 있지만 과거처럼 최종 결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주지는 못한다. 제품을 인지해도 탐색과 평가 과정에서 제품 선택의 고려가 바뀔 수 있다. 제품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후 유튜브에 수많은 추천 리뷰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축으로는 소비자가 구매고려 없이도 숏폼의 발견을 통해 제품을 사는 현재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
최근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많은 C 레벨들이 인지, 선호, 구매 고려 제고를 책임지던 기존의 광고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다. 광고주의 요구가 크게 변화했다는 WPP의 자료는 사실이다. 며칠 전 만난 식품 회사의 임원은 내가 준비한 새로운 마케팅 방법론 발표 자료를 보고 그 자리에서 비딩 없이 내년 신제품의 마케팅을 같이 하자고 했다.
펜타클에겐 좋은 일이지만 반대로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일들에 우리가 소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겁이 나기도 했다.
주말에 [먼저 온 미래]라는 책을 읽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AI)이 바둑계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바둑계의 변화를 다룬 책이다. 작가는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직접 인터뷰하여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10년 전의 AI는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던 바둑계는 엄청난 충격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이 책은 AI가 다른 전문직이나 창작자들의 세계에 가져올 충격을 미리 엿볼 수 있다. 바둑계는 AI의 등장으로 인해 프로기사들이 평생 익혀온 기존의 바둑 이론과 공부 방식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많은 프로기사들이 바둑을 그만두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세돌이다. 거의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AI로부터 다시 바둑을 배워야 하는 숙명을 받아 들어야 했다.
광고계도 미래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DATA, AI, 스마트폰 때문에 소비자의 구매 행태는 과거와 다르게 진화되었다. 특히 AI의 등장은 바둑계에 알파고가 등장한 것과 같은 변화를 광고계에 요구할지 모른다.
가장 무서운 일은 내가 왜 도태되는 지도 모르면서 도태되는 일이다. 지금의 시대가 그렇다. 세상은 변화하는데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만으로 나는 무언가를 잘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AI를 광고에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크리에이티브한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인지나 호감을 높이기 위한 영상 광고가 광고의 전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어쩌면 우리는 도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변화에 민감해져야 하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