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핀드로 Aug 05. 2022

번식은 본능일까? 생존전략일까? <하>

결혼하지 않는 친구들을 보며 깨달은 점

TV홈쇼핑에서 해외여행상품을 파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들 녀석한테 한 마디씩 한다.

 “아들, 나중에 커서 돈 벌면 아빠, 엄마 저기 여행 좀 보내주라.”

 “안돼, 나 집 사고 차 사야 하는데, 아빠 엄마 여행 보내줄 돈이 있겠어?”

 “야, 아빠가 너희들 데리고 여행 많이 갔잖아. 아빠 엄마도 몇 번은 보내 줘야지.”

 “싫어, 내가 가고 싶다고 한 적 한 번도 없었어.”

 농담으로 건넨 이야기인데 돌아오는 진담에 마음 한쪽이 시리다. 


***


 아이를 낳기 전에 고민했어야 했는데, 아이 둘 다 중학생이 된 지금에야 인간의 출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 왜 출산하는지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아직 없다. 어떤 이는 출산이 남녀 간 사랑의 결정체라고 미화한다(스스로 거짓말이란 걸 잘 알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인간에겐 생존과 더불어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 개체 번식이 아니라 종족 번식의 본능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어휘 선택일 것이다.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워낙 흔하기에.


 그런데 종족 번식의 본능이라니, 나는 호모 사피엔스종을 유지하기 위해 두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애들이야 보고만 있어도 좋긴 좋다 (요즘은 잠든 모습만 이쁘다.). 하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고, 그 본능에 따라 출산을 한다는 말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스스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나 외모를 스스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출산에는 다른 생물의 번식과 달리 숭고하고, 성스럽고, 아름답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감정과 사고가 있고, 심지어 고차원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기에 생겨난 착각이다. 과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믿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해이다. 


 우리 몸을 커다란 현미경으로 세포 단위, 나아가 원자 단위까지 확대해서 들여다본다. 그럼 이게 인간인지, 파충류인지, 심지어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이는 피카소 그림과 우리 딸아이 그림이 꽤 달라 보여도 2cm 앞에서 들여다보면 구분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과 다른 생물들은 생긴 모양부터 살아가는 모습까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 기준이다. 세균이나 물고기의 눈에는 인간과 원숭이가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이 출산하는 목적 또한 앞서 얘기한 식물, 동물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출산을 하는 목적도 당연히 부모의 생존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출산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엄연한 선택의 결과다, 따라서 부모는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확률’과 ‘예상 수익’을 산출하여 출산의 ‘기댓값’을 계산한다. 그 계산 결과, 투자 대비 수익이 날 것이라 판단될 때 비로소 에너지와 자원을 투자하여 출산을 한다. 이는 신규 사업 진출에 앞서 수익성을 따져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기업의 경영 방식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대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은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으며, 자녀를 위해서라면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신성한 모성애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말들을 인정하고 싶어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발목을 잡는다. 출산이 생존만큼이나 강한 본능이거나 사랑에 수반된 신성한 결정체라면 왜 많은 선진국들의 출산율은 이렇게 낮을까? 능력이 되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을까? 결혼을 해도 자녀 없이 사는 딩크족은 왜 이리 늘고 있을까? 딸을 낳아도 번식에 성공한 것인데 왜 여러 문화권에서는 굳이 아들만 선호하나? (심지어 태아가 여아라면 낙태를 하기도 한다.)


 출산을 그저 본능이라고 본다면 앞서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다. 하지만 출산이 부모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미안하다, 애들아…)


 그런데 부모는 출산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꼼꼼히 계산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당연히 그런 기억은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의식’만이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무의식도 쉴 새 없이 계산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을 못 할 뿐 우리는 계산한 적이 있다.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녀와 함께하는 미래 모습을 상상한다. 길거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부, 유모차 속 귀여운 아기의 미소, 공원에서 아이를 목말 태우고 산책하는 아빠, 식당에서 떼쓰며 우는 아기, TV나 영화 속에서 쉴 새 없이 사고 치는 아이들… 이런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자녀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이 순간 우리의 무의식은 자녀를 낳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정보를 모으고 계산을 한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보유한 두뇌의 대단한 계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출산은 하지 않는 딩크족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 유지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계산을 마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계산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애를 제대로 교육시킬만한 수입이 안돼서, ’ 애를 편히 지낼만한 집이 없어서’, ‘일에 매진하기 위해’ 등과 같은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는 핑계와 명분을 댄다. 


 참고로, 인간에게는 무의식의 선택에 대해 핑계와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다른 인간과의 협업과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적절한 핑계와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를 해치고 생존 자원을 빼앗더라도 적절한 명분을 대면 집단에서 축출당하지 않는다. 맘에 안 드는 누군가와의 협업을 거절하더라도 적절한 핑계를 대야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협업 제안은 계속 받을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생존 자원을 강탈당하더라도 그럴 만한 핑계를 적당히 둘러대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경쟁력 없는 인간으로 간주되어 집단에서 버림받는다. 인간의 두뇌가 큰 이유 중 하나가 이런 핑계와 명분을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계산 결과, 아이가 내 생존에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애를 낳지 않을 것이다'라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부적합한 ’ 이기적 존재‘라는 것을 자백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에는 생존을 위해 던바의 숫자 Dunbar’s number에 해당하는 100명~150명의 부족원을 유지해야 했다. 그때는 영아 사망률이 높고 수명이 짧았기에 이 정도의 부족원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은 가임 기간 내내 출산을 해야 했다. 그래서 원시 시대 합계 출산율은 무려 15 정도에 달했다. 


 그런데 생식 능력이 있으면서도 출산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은 협업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너무 많은 출산이 협업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안정적인 개체 수 유지에 동참하지 않으면 부족원으로서 부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지금은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나 된다. 그래서 출산을 안 하는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진 않는다 (그래도 결혼과 출산을 권유하긴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출산을 거부하여 집단 구성원에서 배제되거나, 협업 파트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비칠까 봐 두려워한다. 이 또한 생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 합리적인 명분을 찾아 둘러댄다.


 출산을 하지 않는 이유로 선진국에서는 흔히 경제적인 사유가 언급된다. 아이들의 교육비가 많이 들고, 집값이 비싸고, 소득이 적고, 일자리가 불안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즉, 아이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면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무자녀의 이점은 누리되,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행복을 고려할 만큼 배려심이 깊고 집단 구성원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신기하게도 빈곤국가에서의 출산율이 오히려 훨씬 높다. 따지고 보면 선진국은 교육, 주거, 일자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빈곤국가보다 훨씬 더 많다. 선진국에서의 열악한 생활환경이라 할지라도 전 세계적으로 볼 때는 과히 나쁘지 않은 수준인 경우도 많다. 따라서 진짜 출산을 하지 않는 사유는 자녀가 자신의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신경계의 계산 결과 때문이다. 


 집 살 돈이 없어서 출산을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인 것이다. 사실은 돈이 충분해서, 굶을 가능성이 적어서, 혼자서도 능히 살아갈 수 있어서 출산을 안 하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출산도 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 수 있으면 후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 결과에 따라 출산을 멈출 수 있다는 건, 출산이 무조건적인 본능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출산은 부모의 생존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37억 년 전부터 딱 내 위의 부모님까지의 번식은 모두 성공적이었으나, 이제는 한 번쯤 수익성을 따져봐야 하는...


 그럼 부모는 자녀가 어떤 면에서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출산을 할까? 과연 자녀의 쓸모는 무엇일까? 조선 시대만 해도 피임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아의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에 여자들은 거의 가임기 내내 출산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합계 출산율 기준 6.9명의 아이를 출산했고 (현재 양반가의 기록만 남아 있다.), 그중 위험한 영아기를 거쳐 살아남는 아이 몇 명만 성인이 되었다. 


 아이가 크면 여러 방면에서 부모에게 도움을 준다. 농사를 짓던 시절에 아이들은 곧 농업 생산력의 제공자가 되었다. 한 명의 아이가 성년이 되면 2~3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능히 생산할 수 있었다. 즉 옛날의 아이들은 곧 부모에게 많은 식량, 바로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부모가 나이가 들어 1인분의 생산성에 미달하게 되면 아이는 부모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따라서 부모는 노후의 생존을 위해서 우수한 생산력을 지닌 자손들이 필요했다.


 일할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더 많은 식량을 수확할 수 있던 시절, 많은 자녀는 곧 높은 생산성이자, 큰 재산이자, 장수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농업 사회에서는 다산을 선호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자녀가 1인분 이상의 생산성을 갖추기 전까지는 부모가 양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많은 자녀를 낳으면 양육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재산과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한 후 적절히 출산을 해야 했다. 흥부는 충분히 손가락질받을 만했던 것이다 (대출로 리스크 높은 선물옵션투자를 한 것과 같다).


 현대의 일부 빈곤 국가나 빈민층에서는 과거의 농경 시대와 비슷한 모습을 여전히 보인다. 빈곤 국가의 아이들은 10살 정도만 되면 바로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그래서 빈곤 국가의 가난한 부모들 중 일부는 자녀를 10살 정도까지만 키울 수 있다고 판단되면 가능한 많은 자녀를 낳는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농경국가나 빈곤국가가 아니다. 그럼 현대의 우리에게 자녀와 출산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돈이 있으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안다. 신체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언제든 살 수 있고, 위험한 일은 다른 사람을 고용해 회피할 수 있고, 몸이 불편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식량이 가장 중요한 생존 자원이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다재다능한 돈이 가장 중요한 생존 자원이다. 

 생존에 도움이 되는 자원이라면 가능한 많이 확보하고 저장해 두려는 본능이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자녀를 낳는 것도 생존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저장하려는 본능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돈을 버는 것도 과거의 농사처럼 나이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보다는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노후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여긴다. 나중에 부모가 나이가 들었을 때 돈을 벌어 부양해 주고, 몸이 아플 때 보살펴 주고, 집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같이 싸워주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 꺼내 주고, 장애가 생겼을 때 연명할 수 있게 돌봐 주고, 바뀐 환경에 적응 못할 때 필요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주는 존재가 바로 자녀다. 이런 장점으로 자녀와 함께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출산을 실행한다. 


 그런데 환경이 변했다. 현대의 인간 사회에서는 젊었을 때 돈을 모아 저축을 할 수 있다. 쌀은 오래 두면 상하고 도둑이 들어 다 잃을 수도 있지만 금융기관에 맡겨 둔 돈은 상하지도 않고 도둑이 훔쳐갈 수도 없다. (그런데 내 돈은 누가 훔쳐가는 것 같다.) 그 돈으로 안전과 서비스를 사서 혼자서 노후까지 잘 살 수 있다. 또 나이와 상관없이 투자를 통해 돈을 계속 생산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결혼을 해도 출산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부모는 이런 사정을 자녀에게 솔직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애정을 쏟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함께 만들어내는 거짓말 또는 과장된 표현이다. (세상 모든 부모의 처지가 같기에 모두 똑같은 거짓말을 한다.). 즉 나중에 자녀로부터 자신이 투자한 것 이상을 쉽게 돌려받기 위해 자녀를 세뇌하는 셈이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 애들아.) 


 하지만 이런 사실을 말해줘도 자녀들은 여전히 부모를 사랑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 더욱 엄마 품과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는 마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자녀도 부모와 똑같이 이기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는 자녀가 아주 어려서 말과 거동도 제대로 못할 때, 본인의 에너지를 투자해서 자녀를 돌봐 주었다. 자녀로서는 그 기간 동안 아무 에너지 소모 없이 잘 먹고 잘 살았던 시절이다. 그러니 엄마 품이 곧 천국이었다. 천국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또 고향의 환경은 이미 나의 신경계 속에 정보로 충분하게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사람이나 길을 찾기 위해 신경계가 많은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엄마와 고향을 그리워할 뿐이다. 그 사람과 그 장소가 아니라 그 환경을...


 다시 정리한다. 자식은, 가족이란 이익 집단의 생산력을 증가시켜서 부모 개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또 부모의 노후에 대비한 생존 자원의 인적 저장 수단이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노후나 비상시 생존 확률을 높여줄 일종의 보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실패하면 자신이 실패한 것 마냥 낙담하고, 자녀가 성공하면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기뻐하는 것은 자녀가 가진 생존 자원이 곧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 조상들은 자식 봉사가 아니라 자식 농사라고 했다. 정말 정확한 표현이다. 큰아들 녀석이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새벽 1시까지 아들 방에 불이 켜져 있길래 칭찬해주려고 들어가 봤다. 이 녀석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무래도 난 농부 체질이 아닌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번식은 본능일까? 생존전략일까?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