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국민소득이 3만 5천 불인 지옥이 있다니...
내 생애 첫 번째 해외여행지는 1992년의 유럽이었다. 한 달간 유럽을 여행하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우리나라는 살짝 초라해 보였다. 얼마 전 다시 찾은 유럽은 3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유럽도 나름 달라졌겠지만 우리나라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제는 오히려 우리나라에 비해 부족한 점이 여기저기 눈에 띌 정도였다.
한때 우리는 옆 나라 일본의 경제를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 자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물가까지 감안한 1인당 국민소득은 양국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대단한 속도로 성장해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른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의도라면 괜찮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 의미는 아닌 듯싶다. 2010년대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헬조선'. 천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가깝지도 않은 우리나라를 왜 헬조선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행복은 도파민이다
동서고금 수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종교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다. 그런데 요즘 뇌신경학자와 물리학자들은 행복을 어느 누구보다 명쾌하게 정의한다. "행복은 도파민이다."
그렇다. 우리의 신경계 속에 신경전달물질의 하나인 도파민이 분비되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노숙을 하고 쫄쫄 굶어도 도파민만 분비된다면 진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해지고 싶다면 도파민이 많이 생성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도파민, 내가 원할 때마다 아낌없이 팍팍 분비되면 좋겠지만, 아주 치사하게 분비된다. 도파민은 우리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 분비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을 쳐다보면 '난 꼭 행복해질 거야'라고 아무리 다짐해도 도파민은 좀처럼 분비되지 않는다.
치사한 도파민 분비 법칙
도파민의 분비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10만 원을 주으면 도파민이 한 방울 분비된다. 그럼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다음날 길을 걷다가 10만 원을 또 주으면 역시 도파민이 분비되며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다음 날 다시 10만 원을 주으면 전과 같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될까? 아니다. 안 나오거나 조금만 나온다.
첫째날과 같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려면 얼마를 주워야 할까? 10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을 주워야 한다. 그런데 20만 원씩 매일 주워도 어느 날부터는 도파민이 말라붙는다. 즉, 같은 금액을 계속 주으면 어느샌가 도파민은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럼 10만 원, 20만 원, 30만 원... 이렇게 산술급수적으로 하루에 10만 원씩 늘어나면 도파민이 계속 분비될까? 이 또한 아니다. 며칠 지나고 나면 도파민은 분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진 재산이 매일 10만 원씩 일정하게 늘어나는 '등속도 운동'이다. 이 경우는 미래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면 꾸준하게 도파민이 분비되려면 얼마를 주워야 할까? 가진 재산이 증가하는 속도가 계속 증가하는, 즉 가속도가 + 인 상태여야만 한다. 즉, 10만 원, 20만 원, 40만 원, 80만 원, 160만 원... 이런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야 도파민이 끊임없이 분비된다.
도파민은 마약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큰 쾌락을 준다. 하지만 사라질 때 우리에게 큰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먀약 중독자가 금단현상을 겪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의식은 상실감을 메꾸고 쾌락을 얻기 위해 몸을 움직여 무엇이라도 하게 된다. 즉, 고된 생산 활동도 마다하지 않고 성큼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즉, 도파민이라는 치사한 보상체계를 이용해 신체는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고생'을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미끼로 온갖 범죄 심부름을 강요하는 마약 조직의 보스처럼...
그럼 우리가 최대한 열심히 일해서 돈, 명예, 권력, 재능, 인맥 등의 생존 자원을 기하급수적으로 거두어들이면 계속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불가능하다. 0.1mm 두께의 종이를 26번 접으면 에베레스트산의 높이가 되듯이, 도파민을 일정하게 유지할 만큼 생존 자원을 거두어들이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우주 전체의 물질을 모두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닫힌 계'이다. 우주 속 물질이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질에 욕심을 내는 물질만능주의에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
도파민은 왜 이리 치사한가?
도파민이 이런 치사한 분비 방식은 인간에게 '욕망'을 갖게 한다. 그 욕망은 우리의 신체가 흩어지지 않고 (=죽지않고) 최대한 오래 생존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다. 만약 호모 사피엔스가 '욕망을 버리고 만족함을 알라'는 현인들의 말씀을 명심하였다면 지금쯤 네안데르탈인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잘 따지고 보면 도파민의 분비 방식이 우리 인류가 지금껏 성공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임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첫 번째 원시인은 하루에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한다. 그런데 토끼 한 마리면 그날 하루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다. 그래서 그 원시인은 하루 한 마리만 잡고 남는 시간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참나는 누구인지 명상을 하곤 한다.
두 번째 원시인은 첫 번째 원시인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일 태풍이 오거나 큰 비가 내려서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되면 굶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원시인은 하루에 토끼 한 마리로 만족하지 않는다. 토끼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 정도는 비축해놓아야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세 마리 이상 사냥하는 것은 쓸데없이 힘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 원시인은 토끼 한 마리를 잡으면 그다음 날은 두 마리, 또 그다음 날은 네 마리를 잡아야 비로소 만족을 하는 불만, 불평, 걱정, 욕망 투성이다. 그는 토끼고기 저장고에 토끼가 가득 차서 부패하는 데도 계속 더 많이 사냥하려고 한다.
첫 번째 원시인과 두 번째 원시인은 세 번째 원시인이 어리석어 보인다. 그에게 하루에 한 두마리의 토끼로도 먹고 사는데 충분하니 쓸데없는 걱정과 욕망을 갖지말고 적당하게 일하라고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인생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마음을 비우고 살라고 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내내 태풍이 몰아칠 수 있다. 사냥터의 토끼들이 어느 날 몽땅 도망갈 수도 있다. 그런 날이 오면 첫 번째 원시인은 2일 차에, 두 번째 원시인은 3일 차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원시인은 그간 저장해놓은 토끼 고기로 꽤 오래 생존할 수 있다. 불만과 걱정과 욕망과 맞바꾸어 놓은 토끼고기로.....
40억 년에 달하는 생물의 역사 속에 그런 태풍이나 토끼 실종사건은 수도 없이 발생했다. 그래서 지금 생존해 있는 우리는 불만, 걱정, 욕망을 토끼고기와 맞바꾸고 생존해온 조상의 후손이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 DNA 속에는 불만, 걱정, 욕망을 버리지 말라는 정보가 들어 있다. 토끼 고기와 맞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도파민은 우리가 오늘 사냥할 목표량을 달성했을 때 불만, 걱정, 욕망을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해주는 약물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도 사실 원시시대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욕망의 대상이 토끼에서 돈, 명예, 권력, 재능, 인맥 등의 생존자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꿈의 암치료기라는 중입자 가속기. 한번 치료비용이 1억이라고 한다. 돈 많이 벌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는가?)
다시 정리해본다. 우리는 현재 가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쉽사리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도파민은 우리의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때야 비로소 같은 양이 지속적으로 분비된다. 그런데 그런 날은 쉽사리 오지 않으며, 오더라도 지속될 수 없다. 천하제일의 황제나 재벌이라도 물리적, 수학적 한계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1인당 GNP 그래프를 통해 헬조선을 확인하다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역사상 유래 없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즉, 완만하게 성장한 다른 선진국들처럼 1일 차 10만 원, 2일 차 20만 원, 3일 차 30만 원... 이런 식이 아니라 1일 차 10만 원, 2일 차 20만 원, 3일 차 40만 원, 4일 차 80만 원.... 이런 식으로 대단한 점프를 계속해왔다.
자, 그런데 5일 차인 오늘, 도파민 한 방울을 얻어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려면, 무려 160만 원이나 벌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의 부는 제한되어 있고 국가 간 경쟁도 있으니 이젠 달성 불가능한 수준의 숫자다. 그래서 우리에겐 도파민이 말라붙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과 불만을 갖게 되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만족과 불만족은 각 개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총생산보다 1인당 GDP, GNI 등이 더 의미가 있다. 아래는 우리나라의 연도별 1인당 GNI 그래프다.
우리니라의 1인당 GNI 그래프를 살펴보면, 1997년 IMF, 2008년 리먼사태 때와 같이 일시적 위기를 제외하면 최근까지 꽤 일정한 플러스 가속도(=접선 기울기의 증가율)를 유지하며 상승하고 있다. (Y=X^2 그래프와 유사하다.)
그런데 2010년대부터 가속도(=접선 기울기의 증가율)가 거의 0, 아니면 마이너스 수준으로 지속되고 있다. (Y=X 혹 은 Y=-X^2 그래프와 유사하다.) 물론 IMF나 리먼사태 때는 큰 마이너스 가속도였기에 국민 대부분이 무척 힘들어했으나 1~2년 뒤에 바로 가속도가 큰 플러스값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당시 국민들의 불만은 '헬조선'의 '헬ㅈ..'정도까지 나오다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이너스 가속도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기에 많은 국민들의 두뇌 속에 꽤 많이 분비되었던 도파민이 말라붙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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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을 탈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 여행은 저 위 1인당 국민소득 그래프를 더 위로 치솟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x축의 위치를 더 아래로 내려준다.
행복은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