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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핀드로 Aug 03. 2022

포퓰리즘 네버다이

인간의 선택과 선거의 관계

 대통령 선거 때마다 단골로 나서는 후보들 중에 무척이나 튀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몇 년 전 그는 황당한 선거 공약을 여럿 내세웠다. 아이를 출산하면 3,000만 원, 65세 노인에게는 매달 50만 원, 결혼하는 부부에게 1억 원, 전 국민 기본소득 매달 150만 원 지급… 아직도 회자되는 황당 공약들이다. 한마디로 투표권자들에게 돈과 표를 물물 교환하자는 솔직한 제안 (솔직함은 높게 평가한다), 포퓰리즘 공약의 대표 사례다. 그런데 포퓰리즘 공약이란 사실을 알고도 혹하는 우리의 마음이란…. 혹시 나만 그런가?


***


 집단의 리더를 뽑는 선거를 할 때면 빠지지 않고 포퓰리즘 공약이 등장한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은 동네에 지하철을 놓고, 글로벌 대기업을 유치하고, 학교를 짓고, 공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공부 안 하던 학생은 대학 합격이나 하고 나서 등록금 걱정하면 되는 법, 공약에 필요한 예산은 당선되고 나서 고민할 문제다. 


 학급의 반장을 뽑는 선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장 후보자는 학교에 에스컬레이터를 놓고 급식을 미슐랭 2스타 급으로 업그레이드하겠다며 한 표를 호소한다. 참고로 내가 중고등학생 때 전교 회장 선거의 단골 공약은 두발 자유화였다. 선거가 끝나면 학생주임 선생님의 바리깡은 더욱 바빠졌다. 포퓰리즘 공약의 좋은 예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이상, 이런 공약公約아닌 공약空約을 하는 후보자들 중에서라도 리더를 선출한다. 공약空約을 하는 리더라 할지라도 리더가 공백空白인 상황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폐해를 뻔히 겪으면서도 수백만 년 동안 끊임없이 리더를 선출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공약 검증, 매니페스토 등 포퓰리즘의 폐해를 막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후보자들의 포퓰리즘 공약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왜 헛소리에 가까운 포퓰리즘 공약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는 포퓰리즘 공약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표를 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투표에 앞서 후보자들의 공약을 보는 순간, 바로 미래를 예상한다. 이때 의식과 무의식 속의 계산기가 순식간에 돌아간다. 우리는 그 계산의 결괏값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 결정한다(혹은 투표를 할지 말지…). 


 물론 사람들은 그런 계산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동전 던지기가 아니다. 두뇌 속에 저장된 정보를 이용해 신경계가 엄정하게 수학적으로 계산한 결과다. 어느 후보가 당선되어야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될는지를. 하지만 때론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우연일 뿐이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때로는 우연이 가장 그럴싸한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A 후보에 대한 기댓값

= A 후보가 당선될 확률 X A 후보의 공약 달성 가능성 X 공약의 예상 수익


B 후보에 대한 기댓값

= B 후보가 당선될 확률 X B 후보의 공약 달성 가능성 X 공약의 예상 수익


 우리의 신경계는 위와 비슷한 수식을 이용해 각 후보에 대해 기댓값을 계산한다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하다). 그리고 누구에게 투표할지, 혹은 투표를 아예 포기할지 결정하게 된다. 만약 어느 한 후보의 기댓값이 확실히 크면 당연히 그 후보에게 표를 준다. 두 후보가 거의 같은 기댓값이 나오면 망설이는 부동표가 된다. 두 후보 모두 ‘0‘이라면 아예 투표를 표기한다. 후보들은 이 수식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거 운동을 한다.


 A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려면 자신에 대한 투표권자들의 기댓값을 상대 후보보다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 ‘A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크다고 인식시켜야 한다. 또 자신의 ‘공약 달성 가능성’이 높고, 그 공약이 지역 주민에게 주는 ‘예상 수익’이 크다는 정보를 전파해야 한다. 기댓값은 이 셋을 더한 것이 아니라 곱한 값이기에 어느 하나라도 무시해서 ‘0’이 되면 안 된다. 


 당선될 확률이 ‘0%’ 즉,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후보로 알려지면 아무리 약속을 잘 지키고, 지역에 도움이 되는 공약을 내놓더라도 표를 얻기 어렵다.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무명의 정치 신인은 ‘당선될 확률’이 거의 없다고 인식되곤 한다. 그런 이들이 뛰어난 능력과 성품이 있더라도 많은 표를 얻지 못하는 이유다. 


 후보들이 ‘당선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주요 정당으로부터 공천을 받는 것이다. 정당에서는 애초부터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골라 공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천받은 사람이 의례 ‘당선될 확률’도 높을 거라고 예상한다 (공천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념 따위와 상관없이 철새처럼 당을 옮기는 이유다).


  또 거리 유세를 할 때 많은 선거 운동원을 동원해서 자신이 대세인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선거 홍보 현수막도 많이 붙이고 선거 로고송도 여기저기서 자주 들리게 한다. 미디어를 동원해 자신에 대한 뉴스가 계속 노출되도록 한다. 실제로는 열세라 할지라도, 투표 전 지지도 조사에서 큰 차이로 상대 후보를 앞섰다고 소문도 내야 한다. 처음 선거에 나오더라도 선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뒤에서 지지하는 세력이 어마 무시하다고 떠벌린다. 유세 때 유명 연예인이나 단체장들을 몰고 다니는 것도 한몫한다. 심지어 용한 점쟁이가 자신이 당선된다는 예언을 했다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급하면 지나가는 똥개의 힘이라도 빌려야 한다). 선거가 결국 돈싸움이 되는 이유다.


 ‘당선될 확률’을 충분히 높였으면 이제 ‘달성 가능성’을 높게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자신이 약속한 것은 꼭 달성했음을 드러내야 한다. 도로 건설, 학교 신설, 가로등 정비, 쓰레기통 설치 같이 사소한 건이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현직 국회의원은 의정보고서로 자신의 공약 달성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정치 신인은 보여줄 방법이 마땅치 않아 불리하다. 이런 이유로 너무 허무맹랑한 공약을 내세우면 안 된다. 사람들이 공약 달성 가능성을 '0%'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약이 주민들에게 가져다주는 수익이 매우 크게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 이건 비교적 쉽다. 주민들의 재산, 즉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많이 주는 지하철, 도로, 학교와 같은 인프라 건설 공약을 내세우면 된다. 하지만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형 사업을 공약으로 걸었다고 끝이 아니다. 지역 주민 각각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쉽게 가시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민들이 예상 수익을 '0원'으로 간주하여 당선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경 보호 사업이나 노동 환경 개선과 같은 공약은 정말로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런 공약의 예상 수익이 그리 크지 않다고 느낀다. 신경계가 수익 계산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를 얻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경 보호와 노동자 권익 향상을 내세우는 진보 정당들이 많은 표를 얻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예상 수익은 간접적인 것보다 직접적이며, 즉시 효과가 있는 것이 득표에 유효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수십 년 전의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자들은 집집마다 돈 봉투를 노골적으로 돌리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돈만 받고 표를 안 주면 인간 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 선택에 대해 전두엽이 만들어낸 그럴싸한 명분일 뿐이다. 이들은 뇌물을 받아 실리를 챙기는 한편, 자신이 협업 관계에 있어 신뢰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대화 상대방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실제로는 머릿속 계산을 통해 자신의 생존 자원 득실의 기댓값을 구하고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을 한 것일 뿐이다. 즉, 한 후보자가 금품을 건네면 비록 ‘당선 확률’과 ‘공약 달성 가능성’이 낮다 할지라도, 당선 시에 내가 얻을 수 있는 ‘예상 수익’을 크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기댓값이 크다. 


 이때 후보자가 건넨 금품이 몇 푼 안되더라도 효과는 크다. 우리의 두뇌는 그 후보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생존 자원을 건네주는 겸손하거나 관대한 사람이라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도 그가 계속 나에게 대가 없이 생존 자원을 건네줄 가능성이 높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돈 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받으면서 내일은 2만 원, 모레는 4만 원, 글피는 8만 원을 받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계산한다. 즉 그 가속도가 유지된다고 예상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꼴랑 만 원짜리 한 장에 소중한 한 표를 넘겨주는 그런 저급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8만 원 정도라면 표를 넘겨줄 만하다고 여긴다. 수식의 ‘예상 수익’ 자리에 8만 원을 넣고 계산하니 돈 준 후보의 기댓값이 꽤 커진다. 이게 욕하면서도 표를 주는 이유다. ‘뭘 이런 걸 다... 안 주셔도 원래 찍으려고 했어요’라고 말하는 이유다. 


 간혹 정치인들이 후보 공천에 떨어져서 자해까지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렇게나 주민에 대한 봉사를 하고 싶고, 가진 능력이 뛰어나고, 당선 가능성도 높은 사람이라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국회의원이 아닌 다른 자격으로 봉사하면 될 터인데 왜 공천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그건 공천 여부가 앞서 언급한 수식의 ‘당선 확률’과 ‘공약 달성 가능성’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억과 계산 용량은 제한적이다. 평생 데리고 살 배우자를 고르는 일도 아닌데, 신경계의 에너지를 대량 소모해가며 후보를 검증하려 하지는 않는다 (물론 몇몇은 평생의 배우자도 검증을 소홀히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천받은 자라면 이미 정당 내에서 성품과 능력에 대한 검증을 끝낸 것이라고 간주해 버린다(마치 HACCP 인증받은 식품이면 무조건 깨끗하다고 믿는 것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선택을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그렇게 선택을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를 절감한다. 또한 인간은 범주화하여 기억하기 때문에 공천을 받은 후보자 개인과 소속 정당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떤 정당이 우세한 판세라면 그 정당 소속의 후보자도 당선 확률이 높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후보자가 정당에 소속되어 있으면 공약의 이행 가능성도 높다고 여긴다. 후보자가 당수나 유력 정치인과 찍은 사진을 홍보물에 넣는 이유는, 유권자들이 공약 달성 가능성을 높게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다.


 후보자는 선거 막판이 되면 ‘당선될 확률’과 ‘공약 달성 가능성’을 단기간에 더 높이기 어렵다. 하지만 공약을 통해 발생하는 ‘예상 수익’은 얼마든지 증감이 가능하다. 그래서 후보자들은 다급히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운다. 한 후보가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우면 상대 후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역시 비슷한 포퓰리즘 공약으로 맞대응한다. 선거 막판이 되면 포퓰리즘 공약이 난무하게 되는 이유다.


 또 자신에 대한 기댓값을 올리기 어렵다고 계산되면, 상대 후보에 대한 기댓값을 낮추기 위해 노력한다. 즉 상대 후보는 당선될 확률도 낮을 뿐 아니라 거짓말쟁이라고 흑색선전, 비방, 모략을 한다. 어차피 선거는 등수 싸움이다. 내가 못해도 남이 더 못하면 이긴다. 


 재미있는 사실은, 얼토당토않은 공약을 내는 이색 후보자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표는 얻는다. 굳이 투표장까지 가서 표를 행사할 의지가 있다면 합리적인 유권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표도 못 받을 것 같았던 이색 후보자들이 몇백, 몇천 표씩이나 얻는 것은 왜 그럴까? 모두 실수나 장난으로 찍은 것일까? 


 이는 유권자마다 갖고 있는 정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당선 확률, 공약 달성 가능성, 예상 수익을 모두 다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색 후보자의 당선 확률과 공약 달성 가능성을 ‘0%’가 아니라 ‘0.00001%’와 같이 적은 수로 보는 사람들이 어딘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때 이색 후보자가 내세우는 엉터리 공약의 예상 수익이 워낙 큰 숫자라면? 이때 유의미한 숫자의 기댓값이 나온다. 그래서 그리 많지는 않더라도 지지자가 생기고 표도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들 녀석에게 시험 100점 맞으면 최신형 아이패드를 사준다고 말한다.


***


 튀는 후보자의 황당한 공약 중, 출산 시 3,000만 원 지원은 이미 현실화되었다. 모병제나 국회의원 수 축소도 정치권에서 신중하게 논의되고 있다. 다른 공약들도 그 규모와 명칭만 다를 뿐 이미 시행 중이거나 고려 중인 정책들이 여럿 있다. 사람들에게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수익을 얻도록 해주겠다는 공약空約, 이는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어차피 세상은 그쪽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Populism Never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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