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뭐야?'
'행복이지'
'행복이 뭔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데?'
'음, 재산이 한 20억 되고, 애들이 명문대 들어가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하는 일 다 잘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아.'
우리는 이렇게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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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정의는 넘쳐난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지구상에 70억 명의 인구가 있으니 아마 70억 종의 행복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70억 명 모두 처한 환경이 다 다르다. 그러니 원하는 것도 다 다를 수밖에... (이 글을 여기까지 쓰는 동안 28개에 달하는 행복의 정의가 사라졌다. 그리고 54개의 정의가 새로 생겼다.) 그래서 행복에 이르는 수단 또한 다 다르다.
예를 들어, 갑부의 행복 리스트에는 돈이 없고, 빈자의 행복 리스트에는 돈이 대부분이다. 어린이의 행복 리스트에는 건강이 없고, 노인의 행복 리스트에는 건강이 대부분이다. 백수의 행복 리스트에는 자유 시간이 없고, 월급쟁이의 행복 리스트에는 자유시간이 아주 큼지막하다. 이렇게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은 사람마다 다르니 객관적인 행복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 다른 행복의 의미, 그 속에 담긴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생존 유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우리의 신경계가 생존 유지의 가능성을 계산했을 때, 그 값이 커지고 있다는 결과값를 얻으면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생존 유지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그건 자신이 선택하는 행위들이 생존 가능성을 꽤 효율적, 지속적으로 높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무의식 속에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 이렇게만 계속 살아가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난 죽을리가 없어."
그래서 행복은 하나의 기쁨, 하나의 성취만으로는 얻기 어렵다. 부자가 되어도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지면 행복을 얻기 어렵다. 부자이면서 건강해도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노후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행복을 얻기 어렵다. 생존의 가능성을 낮추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발생하더라도 자신이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계속 높여가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선택의 기댓값
= (선택의 성공확률 x 성공 시의 수익) - (선택의 실패 확률 x 실패 시의 손해)
우리는 위 수식의 좌변 '선택의 기댓값'이 플러스값인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기댓값이 플러스인 선택이라면 우리의 생존 가능성도 역시 커질 확률이 높다. 반면 '선택의 기댓값'이 마이너스값인 선택이라면 그 반대다.
자신의 선택들이 연이어 플러스 값을 나타내거나 아주 높은 확률로 자주 플러스 값을 나타내면, 미래의 선택들도 역시 플러스 값을 나타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생존 유지 가능성은 계속 향상될 것이라 확신한다. 결국 언젠가는 '영생불사'에 가까워진다고 여기게 된다. '영생불사'야말고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 조금 더 따지고 들어가면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행복이 가르키는 방향의 끝에는 '영생불사'가 있다.
위 수식의 '선택의 기댓값'이 플러스값이려면 우변의 첫 번째 항, (자신이 택한 선택의 성공확률 x 성공 시의 수익)의 값이 두 번째 항보다 커야 한다. 즉, 성공확률이 높거나 성공 시의 수익이 커야 한다. 또 두 번째 항 (자신이 택한 선택의 실패 확률 x 실패 시의 손해)은 가능한 적어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로또를 구입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다. 로또 당첨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먼 미래까지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택한 선택의 성공확률 x 성공 시의 수익)을 (50% X 15억)인 7.5억 정도로, (자신이 택한 선택의 실패 확률 x 실패 시의 손해)을 (50% X 5000원)인 2500원 정도로 놓는다.
(인간의 욕심이란......)
이렇게 계산하면 꽤 큰 기댓값이 나온다. 이를 통해 일시적인 기쁨이나 희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토요일 저녁 9시가 되면 이 기쁨과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성공확률이 1/800만에 불과하기에 첫 번째 항은 200원이 채 안된다. 그런데 두 번째 항은 5,000원이다. 현실 속의 기댓값은 마이너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로또를 사는 행위 따위로는 행복을 얻기란 확률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래도 나는 매주 산다. 통이 커서 5,000원을 0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공부 안 하는 아들 녀석의 명문대 합격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 또한 성공확률이 희박하다. 거의 0에 가깝다. (미안하다, 아들아....) 합격 시의 수익이 아무리 커도 0을 곱하면 0이다. 반면 두 번째 항의 값은 더 크다. (교육비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기댓값이 마이너스가 된다. 마이너스 기댓값이 나오는 선택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생존 유지의 가능성은 낮아질 확률이 높다. 그리고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냥 아들 자신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도록 하면 기댓값이 커진다. 행복이 가까와 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수입이 아무리 높아도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두 번째 항에 들어가는 '실패 확률'이 높고, '실패 시의 손해' 또한 목숨의 가치, 즉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댓값은 무척 큰 마이너스 값이 나오기 십상이다. 전쟁터의 군인이 행복을 얻기 어려운 이유다.
어떤 종교는 천국이라는 내세나 환생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내세나 환생이 있을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과학적인 증거나 증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세나 환생이 있을 경우 얻게 되는 수익은 어마 무시하게 크다. 내세에서 내세로 또 이어지니 이미 '영생불사'인 셈이다. 그걸 숫자로 표현하면 무한대의 값이다. 이때 확률과 수익을 곱하면 확률이 아무리 적더라도 의미있는 큰 숫자가 나온다. 종교 활동에 약간의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더라도 선택의 기댓값은 여전히 플러스값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내세, 환생, 구원, 천국을 내세우는 종교를 갖는 이유이자 종교를 가지면 행복해지는 이유다. 특히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안좋은 사람들에게는 기대값이 플러스인 선택이 현실적으로 그닥 많지가 않다. 빈곤 국가에서 인종이나 직업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도 플러스인 선택은 드물다. 그래서 내세, 천국, 사후세계, 환생, 구원 따위에 의존해서 행복을 얻고자 한다. 그들의 현실이 괴롭고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이유이자, 절대 종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사이비 종교 맹신도들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산속으로, 외국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집단거주지를 만든다. 그래야 수식 속 '선택의 기댓값을 플러스로 유지하여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치트키를 제외하면, 어떻게 해야 선택의 기댓값이 매번 플러스가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다만 못 들은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 답은 이런 것들이다. '소확행',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범사에 감사하라','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라'....
동네 맛집 10곳 방문하기, 아이와 주말마다 공원 나들이하기, 편의점 맥주 종류별로 다 먹어보기, 하루 30분씩 조깅하기, 일주일에 책 2권 읽기.... 이런 선택은 성공 시의 수익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성공확률이 꽤 높다. 거의 100%다. 실패 확률도 낮거니와 실패해도 손해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니 기댓값은 그리 크지 않지만 항상 플러스 값이다.
'티끌모아 태산'이다. 기댓값의 크기와 상관없이 성공적인 선택을 연이어 반복하면, 우리의 신경계는 미래에도 계속 플러스 기댓값을 갖는 선택을 반복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행복이 강도가 아니라 빈도인 이유다. (단, 좋은 기능만은 아니다. 주식이나 도박으로 망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신경계는 변화만 인식하지 현재의 좌표를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성공적인 선택을 연이어 반복하면, 미래에도 계속 생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 예측한다. 그래서 파산한 사람이라 해도 작은 성공들을 발판으로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일종의 고전적 조건 형성이다. 이렇게 우리도 '파블로프의 개'가 되는 셈이다.
아무리 작은 성공이라 해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은 아주 먼 미래까지 성공이 반복된다고 예측하고 그 기댓값을 적분하기 때문이다. 그때 생존 유지의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우리는 완벽한 존재, '영생불사'에 근접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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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론을 실생활에 적용해보았다. 매일 팔 굽혀 펴기 50개 하기, 매일 물 2리터 마시기, 하루 한 시간 걷기, 와이프와 하루 30분씩 대화하기, 일주일에 책 1권 읽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6화까지 정주행 하기....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정말 행복해진다.
그런데 그만 친구의 SNS를 봐버렸다.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와 비교하니 내가 거둔 '성공 시의 수익'이 초라해졌다. 원래는 유의미한 숫자였는데 그만 '0'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기댓값도 마이너스가 되어 버렸다. 나의 선택이 생존 가능성을 낮출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무의식 속에 퍼지며....... 나의 행복은 이리 쉽게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 진짜 행복해지려면 스마트폰을 버려야 한다. (아이폰 중고로 싸게 파실 분 연락 주세요. 아이들 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