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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Nov 14. 2024

남편은 감정 방해꾼이다.

환기는 공기뿐만 아니라 감정에도 필요하다.

동네 청소년 극단에서 레미제라블 뮤지컬 오디션 공지가 떴고 딸아이는 설레어했다.  지난여름방학 디즈니 뮤지컬에서 나름 이름도 있는 배역을 맡고 솔로 노래도 했으니 이번 오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수월하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는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목소리는 좀 낮은 편인데 아이가 오디션을 보는 곡은 매우 높은음을 많이 내야 하는 곡이었다.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이거 말고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보는 게 어떨까 싶어.  그 배역이 너 목소리랑 좀 잘 맞는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엄마, 내가 나이가 어리잖아. 내 나이에 그런 나이 많은 아줌마 배역은 주지 않을 거 같아서 내가 이거 하는 거야.  내 나이랑 사이즈에 맞는 배역을 주지 않겠어? 고등학생들이 키도 크고 하니까 그 사람들한테 아줌마 배역을 주겠지"


아이 나름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한 작전이란 게 있었고 나는 아이가 짜는 이 판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결국 무대에 서는 건 녀석일 테니까.


그리고 대망의 오디션 날 아이는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원래 하고 나면 후회가 남지 않는가?  아이는 오디션을 본 오후 내내 기분이 나빠 보였다. 엄마 아빠가 부를 때마다 툴툴거리고 말끝마다 짜증과 가시가 돋아 있다.


내가 아는 네가 아니다.

아이에게 다가가 묻는다.

"뭐가 문제야? 말해봐"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순간 나는 너무 어이없게도 눈에 그렁거리는 눈물이 참 맑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 새끼는 슬픈데 난 너의 그렁그렁한 눈물마저 예뻐 보인다. 넌 기가 막히게 예쁘고 난 기가 막히게 고슴도치다.


아이는 내게 파고들어 펑펑 울며 말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오디션 망쳤어"

내게 안겨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쓰다듬어준다.

이제 10살인 네가 느끼는 실패는 매우 쓰고 떫을 것이다.  삶에서 느끼는 모든 실패의 맛은 어릴 때나 어른이 되서나 똑같을 테니.


삶은 원래 후회의 연속인데 오늘 너의 후회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자책하는 것이니 꽤 나름의 배움이 있는 후회라는 생각을 하는 차 남편이 다가왔다.


남편은 다짜고짜 아이에게 빨래 바구니를 가져오라고 한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집안일을 시킨다)

아! 이 인간은 왜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지금 애한테 빨래 바구니를 가져오라고 하지?

순간 짜증이 확 올라온다.


원래 남편들은 아내 눈치를 빨리 못 채지 않는가?  눈치 없이 남편은 울먹이는 아이에게 뭐 가져와라 빨래 넣어라 세탁기 돌려라를 시킨다. 등짝을 확 때리고 싶은 마음인데 내 새끼는 아빠가 하라는 걸 또 그걸 다하고 있다. 코를 훌쩍이며 말이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자 남편은 아이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오디션도 망치고 영~ 기분이 안 좋지?"

"어"

"짜증 나고 화나고 후회되고 그렇지?"

"어"

"그게 원래 인생이야.  내가 원한대로 잘 안되고 노력한 만큼 잘 나오지 않는 게 인생이야. 네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안 돼서 짜증 나고 기분이 나쁘다고 네가 해야 할 책임을 지지 않는 건 안 되는 거야. 오늘 네가 기분이 나쁘지만 네가 해야 할 빨래를 돌렸고 빨래를 접었어. 그건 네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너의 할 일을 했다는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일을 했다는 경험이 널 더욱 성숙하게 만들 거야. 앞으로도 더 많은 오디션을 보겠지?  그때 더 잘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오늘은 너의 일을 하는 걸로 충분히 괜찮은 하루인 거야"


남편다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늘 이런 식으로 감정의 무게를 덜어냈던 것 같다.


언젠가 친한 동생이 전화기를 잃어버려서 화가 너무 났는데 다짜고짜 남편은 그 녀석에게 라면을 좀 끓이라고 시켰다. 아니 갑자기 웬 라면?

그때도 나는 딸아이에게 빨래를 시키는 남편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듯 라면을 끓이라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열 살이나 많은 형님이 라면을 끓이라고 하니 친한 동생 녀석은 군말 없이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동생 녀석은 화가 많이 누구려져 있었다.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남편이 그에게 말했다.

"라면 끓이니까 좀 풀렸지?"

"어"

그렇게 우린 라면을 먹고 히히 호호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고 이적은 노래를 불렀다. 되돌릴 수 없는 걸 붙잡고 있으면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후회와 분노로 채워 날려 버리고 오늘 하루 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또 후회와 분노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그게 반복이 되니 세상이 싫고 내가 싫어진다.


그날 남편의 감정방해꾼 역은 너무 완벽하게 필요했던 환기였다.

무겁고 텁텁하고 부담되는 그 감정의 무게를 털 수 있었던 그의 방해가 너무 반가웠던 이유다.


나쁜 기분으로 가득 찬 날에는 그런 방해꾼이 필요하다.


*아이는 오디션에 떨어졌지만 이름 모를 무명의 배역을 맡게 되었다.  무대에만 서도 괜찮다는 아이를 위해 허락을 하려 했으나 아뿔싸... 몇 달 전부터 계획한 휴가 날짜랑 공연이 겹친다. 레미제라블은 다음 기회에 조금 더 크고 성숙해지면 그 못된 아줌마 역을 노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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