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정도 야구장 근처에 산 적이 있었다. 덕분에 한국 야구 시즌마다, 본의 아니게 늘 야구와 함께 하는 일상을 보냈다. 뻥 뚫린 야구장 지붕 밖으로 보이는 환한 조명. 꽉 막힌 도로에서도 그 환한 빛은 집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표였다. 음식점 하나 없는 동네에 치킨 냄새, 오징어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오기 시작하면 야구의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동네지만 경기가 열리는 날만큼은 함성과 응원가로 떠들썩하다. 때론 귀가 얼얼할 만큼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며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애정이 모여 만들어 내는 그 리듬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을이 깊어진다.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날에 들려오는 힘찬 응원가 소리가 때로는 내 인생을 격려하는 함성으로 들리는 순간도 있었다. 나도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에 힘을 싣고 어깨를 활짝 편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야구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기장 주변에서 만나는 팬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솔직해서 그날의 승패를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 하루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내뱉으며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이들과 마주쳤다. 표정이 어두웠다. 어떤 이는 경기에 대한 불만을 거친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경기장 밖으로 “와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 다시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함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나타났다. 아,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역전의 순간을 직접 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다 안타까웠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국가대표 축구 팀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TV 앞을 떠나 다른 일을 하다가, 이웃집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에 서둘러 다시 TV 앞으로 달려가며 후회했던 경험이.
이런 반전의 순간들 때문에 스포츠 경기를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하곤 한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갈등’이다. 시청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작가는 주인공을 최악의 상황까지 몰아넣는다. 작가가 주인공이나 그를 맡은 배우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힘든 역경을 거쳐 끝내 성장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일 뿐이다. 가끔 내 삶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보거나 여러 매체에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반전에 전율하기도 한다.
'야구는 9회 말부터'라는 말이 있듯 우리 인생도 다 끝날 때까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이 고난은 장차 다가올 드라마틱한 영광의 순간을 위한 장치일 뿐이다. 도무지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이들만이 맛볼 수 있는 열매가 있다. 지금 당장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선물이다.
지금 잘 풀리지 않는 경기를 하고 있는가? 중간에 경기장을 나오거나 TV를 끄지 말자. 등 뒤로 터져 나오는 역전의 환호성을 듣고 뒤늦게 돌아보는 대신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짜릿한 역전의 순간에 함께 환호하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관중이 아니라 주전 선수임을 기억하자. 나는 당신이, 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인생의 멋진 반전의 장면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