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독학재수 이야기
야구를 그만두고 나니까 앞길이 막막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동안 야구 이외의 세상은 아무것도 몰랐던 나였기에.
나는 위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명문 대학의 간판 학과보다는, 우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 훗날 나처럼 오랜 기간 해온 운동을 그만두고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될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싶었다.
운동을 그만두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운동이 아니더라도 너희들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다양하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공부를 해야 했고, 수능을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재수의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1번.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 주는 기숙학원에 내 몸을 맡긴다.
2번. 대부분 재수생들처럼 재수종합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한다.
3번. 나의 페이스로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관리를 시켜주는 독학재수학원을 다녀본다.
4번. 처음부터 끝까지 집 앞 도서관에서 독학한다.
학원은 다닐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 힘든 지옥철을 뚫고 다녀서인지,
학원가로 이름 있는 대치동이나 목동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1년 동안 공부를 한다고 통학하면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학원까지 다니는 그 조금의 시간도 아깝다고 느껴졌고, 부모님에게 다시 금전적으로 부담을 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는 직접 계획을 짜고, 나의 페이스에 맞춰서 스스로 부족한 것을 처음부터 채워 나가는 과정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더 보람을 느낄 것 같았고 후회하지 않을 1년을 보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집 앞 공립도서관에서 하는 독학재수였다.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집 앞에 있는 공립도서관, 가끔 집중이 되지 않는 날에는 스터디 카페 정도만을 오가며 공부에만 매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관리를 해주는 사람이 따로 없다는 독학재수의 특성상.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터디 플래너도 하나 샀다.
매일 강의 듣는 시간부터 그날그날 과목별로 진도 나갈 책 페이지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플래너에 각 과목별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느 부분 강의를 더 찾아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말 그대로 수업시간에서만 듣던 이상적인 "자기주도학습"의 1년을 목표했다.
밥 먹는 시간과 식사 후 몰려오는 피곤함이 두려워 하루 한 끼이상 먹을 수도 없었다.
불필요한 SNS는 정리했다.
대학에 가거나 프로를 간 친구, 선배들의 소식을 들으면, 공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남겨두고 모든 연락을 정리했다.
그렇게 정말 독하게 마음먹은 채로,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1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노력한 만큼 성적은 올라갔다.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온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었을 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운동을 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력은 잘 늘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통증은 찾아왔으며, 제한된 출전 기회, 불리한 신체조건 속에서 내가 아닌 남 만을 원망했었던 나였다.
"어차피 재능이 있는 사람들만 잘하는 거잖아"라는 타협으로 내 노력도 갈수록 소홀해져만 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스무 살은 달랐다.
미치도록 노력했고,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즐기자고 암시했다.
힘든 일도 정말 많았다.
독학재수생 신분에 혼자 보내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가끔은 오르지 않는 성적에 좌절도 많이 했다.
나 스스로 의구심도 많이 가졌다.
그렇지만 결과론적인 이야기로,
결국은 내가 희망하는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재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독학재수 안 했으면 어떡할 뻔했지?"라는 생각이 지금도 가끔 든다.
이 시기에 내가 국영수 같은 학업적인 지식보다도, 학업 외적으로 더 많은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의문으로만 가득했던 내 머릿속에 "하면, 정말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더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다.
지금의 내가 끊임없이 다양한 도전을 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까닭도 이때 느꼈던 배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거다.
내가 대학에 온 후 가장 많이 궁금했던 것이,
"만약, 내가 재수를 하지 않고 현역 때 적당히 성적에 맞는 대학으로 진학했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개발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살았을까?"
"어차피 되는 사람만 되는 거니까"하면서, 내 상황을 한탄하고만 있지는 않을까? 같은 질문들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이 혹독했던 재수 생활을 겪지 않고 대학에 그냥 입학했더라면, 이런 교훈도 도전할 용기도, 내 인생에서의 교훈도 얻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정말 노력하면 되더라.
마지막으로, 내가 재수를 했던 2019년 마지막 날.
다이어리에 적어둔 1년 회고글의 일부를 발췌해서 글을 마무리한다.
20대의 출발에 서있었던 지난 1년.
스스로 가장 독해지기로 다짐했었고, 결국 마침내 꿈을 이뤄낸 1년.
나에게 재수를 했던 2019년은
모순적이게도 가장 힘들고 절망도 많이 한 해이자 가장 행복했던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