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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타박 Jun 16. 2024

억울해도 침묵할 용기

가족 관계

나는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두고 판단하는 편이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은 ‘조언’이라고, 그렇지 않은 비판은 ‘참견’ 또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참견이나 오지랖의 경우라면 말을 아끼고, 조언인 경우라도 가끔 말해주고 되도록 아낀다. 좋은 내용도 말을 아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이유는, 문제가 생기면 말을 아끼지 못한 것에서 생겼지, 말을 줄인 것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굳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어렸을 땐 말을 줄이는 게 지혜로운 태도인 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그냥 본능적으로 내뱉었다. 억울할 때 말을 안 하면 그건 바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주장은 강하게 어필하고 상대의 주장은 강하게 반박했다. 그리고 화가 나면 강하게 짜증 냈다. 후진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 많이 주장하고 많이 비판하는 태도 덕분에 많은 배움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그 후진 없는 태도가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집 밖의 낯선 사람들을 상대할 땐 이따금씩 눈치를 봤다. 어디서나 악동이 되긴 어려웠다. 대신 그렇게 밖에서 내 목소리를 억제한 날에는 특히나 집에서 답답함을 해소했다. 가족들은 어린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깝고 편한 존재였기에 이놈의 입에 필터가 없었다. 얼마나 가족들 속을 썩이는 말을 많이 했는지. 다행히 고등학생 때부터는 점점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고, 자연스레 대화의 빈도도 줄었다. 부모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도 줄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다시 부모님과의 대화가 늘었다. 다행히 나도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지려는 척을 한 덕분인지 부모님과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입장이 바뀌는 듯했다. 내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나이가 점점 늘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요즘 들어 부모님의 짜증이 늘어남을 느꼈다. 이젠 내가 아니라 부모님께서 화를 많이 내신다. 속상했다. 옛날 같았으면 부모님이 짜증을 내시면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다. 토론을 빙자한 피 터지는 자강두천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강일천이다. 더 이상 나에게 부모님을 향한 자존심은 없다. 나는 부모님의 진심을 알기에 부모님 상대로는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부모님이 짜증을 내면.. 그럴 때면 나는 침묵한다.




침묵했다.


그리고 또 침묵했다. 침묵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부리는 짜증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은 보통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화를 낸다. 사람에게는 상위 단계의 뜻과, 하위 단계의 뜻이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과 같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상위 단계의 뜻이고, 그런 본질적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버는 것'과 같은 하위 단계의 뜻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그 하위 단계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족이랑 싸운다. 상위 단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위 단계의 뜻이 존재하는 것인데, 하위 단계의 뜻이 상위 단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바보 같은 모순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가끔 본질을 망각한다. 이런 바보 같은 모순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뇌어야 한다. “침묵하자. 그리고 본질을 깨달으면, 그때가 되어서 입을 열자.”




침묵하는 연습은 당연히 쉽지 않다. 아무리 부모님을 향한 자존심을 억제하려 노력하더라도 정말 가끔씩은 너무 억울해서 침묵을 깨고 싶은 순간이 존재한다. 나도 한 번은 부모님의 논리적이지 못한 질책에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침묵을 유지하지 못할 뻔한 적이 있었다. 너무 억울했던 나머지 카카오톡으로 1,000자 가까이나 되는 반박 팩트 폭격을 작성했다. 물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쯤 되어서 겨우 침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여전히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이 있었지만, 이 카톡을 보내면 미래의 내가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내 예상대로 몇 시간 뒤의 나는 앞서 반박 팩트 폭격 메시지를 보내는 걸 참은 걸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1,000자 가까이 되는 카톡을 읽고 스스로가 틀렸고 감정에 휩쓸려 아들에게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며 자책할 부모님을 상상하니... 참은 게 천만다행이라 46,000번 생각했다.




부모님과의 갈등 순간에 결국엔 침묵하고 부모님의 화를 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1순위’라는 명백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인 것 같다. 이 명백한 사실을 알고도 모순적으로 얼굴을 붉히는 건 오로지 본능에 의한 붉힘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왜 있겠으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본능적일 필요가 왜 있겠는가. 침묵할 용기를 가지자.


그리고 그저, 포용하고 인내하자.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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