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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Oct 16. 2024

뿌린 대로 거두어질까


<뿌린 대로 거두어질까>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었다. 누구랑 크게 싸웠다. 순탄하기만 한 내 삶에 꼭 한 번은 터질 만한 일이었다. 그 일에는 내 잘못도 있다. 몹쓸 짓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생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납득하지 않는다. 그저 착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강하게 생각하면 그와 연관된 내용 위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내가 우울하면 #우울 과 관련된 무언가가 더 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러고는 속으로 “우울한 일들이 확 몰려오네”라고 착각할 뿐. 근데 그 사람과 싸운 후 곧장 지갑을 잃어버렸다. 옛말 다 맞네;

평소에 잘 일어나지 않는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걸 보며 “내가 벌을 받는가 보다” 생각했다. 세상에 카르마 법칙(업보 청산)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존재한다면 업보가 완전히 청산되기까진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나쁜 짓을 정말 안 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봐 불안하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떨리는 그 느낌이 너무 싫다.

설령 내가 불안에 휩쓸렸다 한들, 나는 최선을 다해 어둠을 가린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또 다른 어둠이 나를 알아보고 따라올 테다. 끼리끼리 알아보는 공명이다. 나는 그저 잠시 어두운 가짜 어둠일 뿐인데, 진짜 어둠이 “너도 어둠이구나?” 라며 동질감을 느끼고 다가오는 게 더럽고 혐오스럽다. 필사적으로 어둠을 가린다.

더러운 어둠으로 내 투명한 빛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나는 맑아 왔고 앞으로도 맑아야만 한다. 그치만 그런 소망과 어긋나게도 지금은 잠시 탁한 상태다. 나는 늘 맑았기에 이번 한 번의 탁함이 낯설다. 만약 내가 또 나쁜 짓을 한다면 더 탁해질까, 그리고 더 불안해질까, 더 초조해질까.


<현명한 균형이란>

탁하더라도 정의를 위해 또다시 용감하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그에게 나다운 반기를 들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선을 넘었나?” “또 벌 받으면 어떡하지?” 오만 걱정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전의 업보로서 이미 안 좋은 일(고가의 지갑 분실)이 터졌는데 여기서 더 청산될 업보가 어디 있겠나 생각했다.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위대한 정의를 실현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해치는 것이더라도.

괜찮은 척, 강한 척하려 노력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기란 역시나 어렵다. 내 몸에서 어둠이 새어 나오는 걸 막기 어렵다. 나는 너무 불안하고 초조했기 때문이다. 다른 어둠이 나를 알아볼까 두렵다. 여기서 무얼 해야 최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번 달에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기로 했는데 그들을 볼 자신이 없다. 안 좋은 풍기 펄펄 흘리면서 접대할 자신이 없다. 최선의 본질을 파악하고 얼른 빛을 되찾자.

이번 싸움이 벌어진 일은 너무 ‘나답게’ 행동한 탓이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만약 누군가 살인하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본성으로 가졌다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그의 정신 건강에 이롭다. 설령 감옥을 가더라도 심리학적으로 마음 건강에 이롭다. 양자택일이다. 살인을 참고 정신병에 걸리느냐, 살인을 하고 감옥에서 평생 사느냐.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환자가 억압해온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해소시켜 주려 애쓰는 정신 분석학/ 분석 심리학의 목적도 윤리를 고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본성을 지나치게 억제하고 페르소나만을 고집하다 정신적 해리(= 자아와 무의식이 분리되는 현상)를 겪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성과 충동을 억제하고 인위적인 페르소나를 가진 채 살아간다. 그래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감옥도 안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페르소나, 즉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가면만을 끼고 평생을 살아간다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 언젠가는 정신병에 걸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 억제하고 있는 무언가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다만 위의 살인 예시나 나처럼 너무 정직하게 해소하면 이번 사건처럼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조금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나 또한 이번 해소가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고 억제하는 충동을 외부로 드러낸 첫 경험이다.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이 경험이 내 마음의 균형을 찾아 주고 앞으로는 어떻게 더 현명하게 균형을 찾을 수 있을지 탐구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나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을 신뢰한다. 경험 상 대부분의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줬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성장한 내가 해결해 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에도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 문제는 서서히 해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불안한 미래가 아닌 어둠을 떨쳐내고 빛을 되찾는 것이다. 근심을 털어내고 본질에 집중하자. 내 목표 달성과 와 밝은 에너지 형성에 집중하자.

​​

출근하는 길, 정류장 앞에서.

​​나와 닮아 눈에 들어왔다. 초록. 그중에서도 더 밝은 노란빛의 잎인데 어둠이 물들었다.

다시 맑은 색을 되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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